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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팩션 32) 왕산 허위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2008.03.16 20:04 수정|2008.03.16 20:04
1915년 9월, 조선총독부는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자축연을 경회루에서 벌이고 있었다. 그 날 낮에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게와 경무총장 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는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테이프를 끊었다. 그들은 대대적으로 시정 선전을 획책하고 그 방편으로 물산공진회를 연 것이었다.

그들은 진열관의 장소로 경복궁 근정전을 고시했다. 조선의 문화재도 일부 진열되었다. 데라우치는 근정전 옥좌에서 총독 축사를 했다. 그는 전시된 조선 유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것 몇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행하는 비서가 지적된 문화재를 메모하고 있었다.

데라우치는 어려서 외가에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외가의 양부는 그에게 자기의 성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바꾼 성이 데라우치였다. 양부는 학자풍이었고 골동품에 취미가 있었다. 그의 영향으로 데라우치는 교육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다른 민족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일단 조선의 정신적인 문화를 억압하고 말살하는 일이 최우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질경이는 밟아도 뿌리가 있으면 다시 고개를 든다는 일본 속담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헌병을 동원하여 조선의 민족 정서와 관련되는 책들을 압수하고 출판을 금지시켰다. 그는 서울 광통교 일대의 서점은 물론이고 지방 곳곳의 향교 서원 사찰 양반집까지 수색시켰다. 결과 압수한 책이 51종, 20여만 권을 넘었다. 그는 조선 병사 만 명을 죽이는 것보다 조선의 얼이 담긴 책 한 권을 없애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해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다. 신라의 김생과 고려의 신품사현이 쓴 글씨, 고려 말 이색, 정몽주의 서신, 추사 김정희의 완당범첩조눌인정서, 김홍도·윤두서·정선의 그림을 묶은 흥운당첩, 조선의 왕세자가 세자 교육기관인 시강원에 입학하는 장면을 그린 정축입학도첩, 영조가 시인 24명과 함께 시를 짓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그들이 지은 시를 함께 묶은 제신제진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유산들이 일본의 대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데라우치는 조선의 사고(史庫)가 있던 오대산 월정사에 오께구찌를 비롯한 학자와 헌병을 보내 인근 주민을 동원하여 8일 간이나 뒤져 조선왕조실록 한 벌을 비롯한 수많은 서책을 압수하여 동경대학에 보냈다. 동해안 법문진을 통해 빼돌린 이 책들은 짐짝으로 150덩이나 되었는데,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모두 불에 타 사라지게 된다.

물산공진회는 경복궁을 왕궁이 아닌 유희장으로 바꾼 행사였다. 그들은 근정전 행각의 사무실과 활자, 서적고를 부숴버렸다. 그 결과 볼품없이 휑뎅그렁한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조선의 건축물에 열등감을 갖는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기회만 오면 안 보이도록 가리든지 없애 버렸다. 그들은 경복궁 북쪽 행각의 아름다운 서적고와 활자고도 헐어냈다. 심지어는 창덕궁 화재가 났을 때, 보수 공사를 명분으로 경복궁 교태전을 해체하여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데라우치의 기분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그는 조선 인민이 일본의 덕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한강 철교가 복선화되고 호남선이 개통된 데다 경성우편국 청사가 곧 준공 예정으로 있었다. 여기다가 물산공진회까지 성공적으로 열렸으니 조선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요즘 들어서는 조선인들의 저항도 거의 없었다. 그는 총독으로서의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본국 정부에서도 자신이 성공리에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평판이 돌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는 내년쯤에 본국 중앙 무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쯤 눈을 감고 조선 기생들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있던 데라우치는 술잔과 얼굴을 동시에 아카시에게 돌렸다.

“경무총장, 그 여비서는 요즘 안 보이네요.”
“네 본국에 돌아갔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백주원만 생각하면 기분이 나빴다. 경무총장에게 국적까지 속여 접근하는 여자가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처음 그는 진력을 다해 그녀를 체포하려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철회했다. 알려져 봐야 자기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배자 명단에서 그녀를 삭제해 버렸다. 그는 마음으로도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완전히 없었던 일로 하려면 자신부터 그렇게 해야 할 터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런 비서가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맞습니다. 최고의 비서였습니다.”
“부친이 대학 교수였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아카시는 씁쓸하지만 순순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카시는 여전히 백주원을 매력 있는 여자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미모와 교양을 갖춘 여자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는 사실은 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카시는 데라우치와는 기질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인이더라도 훌륭한 인격자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학자의 풍모를 내려 하면서도 조선인들에게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데라우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카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한 조선인 허위를 떠올리면 상관 데라우치가 더 못마땅했다. 그는 7년 전 조선인 의병장 허위를 직접 심문한 일이 있었다. 허위의 호는 왕산이라고 했다. 그는 성균관 박사와 평리원 수반판사를 지낸 문관이었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그는 양주에서 서울 탈환 작전을 위해 의병대장 전체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이 되어 2000의 의병을 거느렸다. 그는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까지 쳐들어갔다. 놀란 일본군은 중무장한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맞섰다. 허위의 의병대는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끝내는 힘이 달려 퇴군하였다.

이완용은 임진강으로 사람을 보내 허위에게 경상도 관찰사나 내무대신 등의 관직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창 너머 흐르는 강물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으로 거절을 표시했다. 허위는 다시 의병 거사를 도모하다가 1908년 6월 11일 아카시가 보낸 헌병대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아카시는 허위를 직접 심문했다. 허위는 온화하고 박식한 학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연로한 노인이 어디서 그런 대담한 기운이 나와 의병 거사를 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허위는 자신이 한 일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당신 같으면 조국이 망해 가는데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카시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왕산 선생 같은 분에게 적합한 호칭이 있습니다. 선생은 조선의 국사(國士)이십니다.”
아카시에게는 가끔 그런 도량이 있었다. 그에게는 폭도의 수괴를 국사로 바꿔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그는 총독부에 찾아가 데라우치를 만났다. 그는 데라우치에게 헌병사령관의 체면을 걸고 허 위의 구명을 건의했다. 언제나 관대한 학자연하는 데라우치는 부드러운 어조로 헌병사령관의 체면을 묵살해 버렸다.

불과 4개월 후 허 위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때 옥관이 유언을 말하라고 하자 허위는 창살 너머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의를 펴지 못하였는데 유언은 무엇에 쓰랴?”

허위는 서대문 형무소 사형 1호였고, 그의 호 왕산은 먼 훗날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의 도로 이름 ‘왕산로’로 부활하게 된다.  

그 해가 기우는 섣달 말일이었다. 상해 명덕리에서는 망년회가 열리고 있었다. 망년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신규식은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모두가 배고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간난 속에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서 무장 투쟁을 하던 이, 간도에서 무관학교를 하던 사람, 만주에서 마적과 석여 있던 사람,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람, 북경이나 천진 같은 도시에서 나름대로 구국 운동을 하던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이역에서 겪는 향수와 생활고는 그들이 안아야 하는 이중고였다. 그들은 더러는 학생이었지만 점원도 있고 잡화 행상인도 있었다. 거기다가 주방장도 있었고 전기공도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은 것은 무직이었다. 무직자들은 대개 상해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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