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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까맣게 타버린 날

[백하단상 6] 찰나의 방심은 재앙을 부른다

등록|2008.03.18 09:45 수정|2008.03.18 09:45
꽃소식이 들뜨게 했다. 산수유와 매화가 사람을 부르고 강과 산이 새 단장을 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다.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바람에 몸을 풀고 꽃향기에 마음을 달래고도 싶었다.

그러나 일요일은 정원의 텃밭을 갈고 나무를 심기로 계획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밭을 갈겠다기에 9시경에 가서 기다렸지만 약속한 ‘몽굴이 이장’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날 가져다 놓은 감나무 묘목을 먼저 심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구시렁거리며 전정한 나무 가지를 모아놓은 퇴비장에 불을 붙였다. 쉽게 타지 않은 나무들이라 해지기 전에 처리할 요량으로 일찍 서두른 것이다. 그리고 정원 입구에 버려진 큰 돌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때서야 ‘몽굴이 이장’이 나타났다. 와준 것만도 고마워 다른 일을 보다가 늦었다는 사람에게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은 이미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불나기 전의 잔디밭멀리 트랙터로 밭가는 가는 모습이 보인다. ⓒ 홍광석


땅이 넓지 않은 탓에 쟁기질을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분 정도 트랙터로 몇 번 왔다갔다 하니 끝이었다. 그리고 몽굴이 이장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바쁠 것 없다는 듯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반복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농촌에서 일 해줄 사람을 구하기 힘든 마당에 섣불리 서운하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홍매몇 시간 후 일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사람의 한계인가. 잔디밭의 홍매만 곱게 보였다. ⓒ 홍광석


점심 때를 훌쩍 넘기고서야 그는 일어섰다. 오전 나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버린 셈이었다. 겨우 감나무 열주를 심고 점심이나 먹자고 남평읍에 다녀왔다니…!

헉!

이웃집에 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있어 인사를 하고 정원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아내는 할머니들 쪽으로 달려가고 나는 잔디밭에 펼쳐진 상상할 수 없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절반쯤 까맣게 타버린 잔디밭. 아침에 나뭇가지를 태운 불씨가 바람에 날려 잔디밭에 옮겨 붙은 결과였다.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불붙은 잔디밭을 보고 이웃집에 달려가 말해서 마을에서 일하던 남자 분들이 달려와 끌 수 있었다는 장황한 설명에도 그저 가슴만 뛰었다.

“산으로 붙었으면 헬리콥타가 뜰번했제라. 불행중 다행이구만이라.”
불행중다행이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옆에 산에 불이 옮겼으면 어쨌을 것인가! 순간의 방심이 빚은 실수였다.

“봄철 불을 불불불불하고 탄단 말이요.”
“깐닥했으면 하우스가 타질번 했제라.”
“불끄다가 머리를 꼬실라 부렀구만이라.”

마을 분들의 말에 하여튼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만 열심히 했다. 다른 피해는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탄 잔디밭순간의 방심으로 까맣게 타버린 잔디밭. ⓒ 홍광석


경황 중에 손님까지 들이 닥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오후였다. 늦게야 남은 감나무 열주를 심고 물을 주고 나니 해는 이미 서산을 넘고 있었다. 길었던 하루. 봄철 불조심을 강조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았던 날. 아내와 나는 뜻밖의 사태에서도 더 이상 큰 일이 없어 안도했지만 분명 잊지 못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내는 불을 보고 지팡이를 짚고 달렸다는 마을 할머니께 뭔가 보답해야겠다고 한다. 불조심 합시다!
덧붙이는 글 그 일이 생각나면 지금도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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