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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돌, 서로를 집요하게 파고든 천년 세월

[캄보디아 씨엠립 여행 3] 따 프롬 사원에서 본 얽히고설킨 인연

등록|2008.03.20 14:09 수정|2008.03.20 22:13

▲ 천년의 세월에도 오전한 모습을 간직한 채 나를 맞고 있는 따 프롬의 무희들 ⓒ fen


양복 윗옷을 벗어 들고 인적 없는 사원 벽에 기대어 있던,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 속 차우의 공허한 눈빛이 떠올랐다. 견고하게 채워진 수리진의 차이나 칼라도 떠올랐다. 농염한 차이나 칼라의 뒷모습이, 스치기만 해도 그 날에 살을 베일 것 같은 고독의 다른 모습임을 처음으로 깊이 공감했다. 그녀는 그 차이나 칼라 안에 자신의 삶을 통째로 유폐시킨 채 빗속을 걷고 있었다.

씨엠립에 다녀온 뒤 꽃처럼 아름다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란 의미의 영화 <화양연화>를 다시 꺼내 보았다.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농염한 차이나 칼라, 저녁 끼니를 위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보온병, 굵은 빗줄기에 이내 묻혀 버리고 마는 꼿꼿한 구두 소리, 그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빗속의 첼로 연주는 여전히 애절하게 아름답다.

▲ 따 프롬의 나무들 ⓒ fen


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집요하게 돌 틈을 파고들고, 사원은 자신을 무너뜨린 나무에 의지하며 서로의 긴 세월을 견디고 있는 곳이 바로 따 프롬 사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돌과 나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진데, 기억을 봉인하기 위해 일부러 떠난 길이라면 이곳 따 프롬이 그 목적지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에서 바이욘 사원과 앙코르와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잠깐 스쳤을 뿐인 따 프롬 사원이 내게 여전히 '화양연화'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것은 나무와 돌의 천년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중략) 나무는 두 가지 일을 했다네. 하나는 뿌리로 불상과 사원을 부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뿌리로 사원과 불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일이라네. 그렇게 나무와 부처가 서로 얽혀 9백년을 견뎠다네. 여기 돌은 부서지기 쉬운 사암이어서 이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흙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사람살이가 다 그렇지 않은가. - 김영하 <당신의 나무>中

직계 왕손이 아닌 방계 지방 영주로서 참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왕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7세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따 프롬(Ta Prohm)' 사원을, 아버지를 위해서는 '쁘레아 칸(Preah Khan)' 사원을 세웠다. 불교를 받아들여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부모를 위한 사원을 지어 자신의 가계를 화려하게 복원시키는 일은 정통성 확보를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따 프롬 사원의 돌에 새겨진 범어로 된 기록에 의하면, 12세기 따 프롬이 통치하던 마을이 3140개에 사원 관리인이 7만9365명이었다 하니, 건립될 당시 따 프롬의 위상이 어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최소한의 통로만 확보한 채 복원하지 않은 사원 ⓒ 이승열


▲ 나무는 사원을 무너뜨렸으나, 나무를 의지하지 못한 돌들은 바닥에 뒹굴고 ⓒ 이승열


긴 세월 사람이 살지 않는 밀림 속 모든 사원의 모습이 따 프롬과 비슷했겠지만, 따 프롬과 몇몇 정글은 오랜 세월 나무와 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완전히 하나가 되어 지내 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발견됐을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뱅골 보리수며, 그물망처럼이나 촘촘하게 뻗은 나무 뿌리(스펑)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무희들의 모습은 그 오랜 세월의 과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통행로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빼고는 모두 그대로 유지했다고 하니, 1860년 앙코르를 발견한 앙리 무오가 느꼈을 당시의 경이와 찬탄이 지금의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물어진 돌 사이에 숨겨진 회랑, 그 회랑 내부에 쌓인 돌무더기, 끊어졌나 싶어 돌아서면 다시 이어지는 회랑, 그 안 부조에 선명하게 새겨진 다양한 표정의 무희들. 풍경이 이러하니, 길을 잃지 않고는 따 프롬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다. 난 그저 길을 잃고 돌무더기 속에서 아직도 춤을 추고 있는 무희와 눈을 마주보고 선다. 나무들의 끊임없는 파고듬에도 천년의 세월 동안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나를 맞아주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 엽록소를 그대로 간직한 건기의 나뭇잎들은 모두 지상으로 돌아가고 줄기는 하늘을 향한다 ⓒ 이승열


다리가 몹시 욱신거린다. 마음 내려놓을 자리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육신의 고통이 먼저 느껴지는걸 보니 마치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앙코르의 치유력, 앙코르의 힘을 믿어본다. 한낮 열대의 태양이 알맞게 달구어 놓은 돌들이 동쪽 성소 모퉁이서 무심히 뒹굴고 있다. 거추장스런 신발이며 양말을 모두 벗어버리고, 적당한 돌을 찾아 그 위에 나를 가만히 내려 놓는다.

▲ 경계도 분별도 사라지고 마는 따 프롬에서의 오수 ⓒ 이승열

나무와 돌, 새와 바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맨발에 묻은 흙먼지, 나뭇잎 하나 달지 않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있는 뱅골 보리수, 초록빛을 그대로 지닌 채 바닥에 뒹구는 나뭇잎, 그것들 사이로 석양의 긴 햇살이 잦아든다. 자꾸 길어지는 나무 그림자가 사원 깊숙이 파고 든다. 그 빛에 무심히 시선을 멈춘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분별이 사라지며 따 프롬의 모든것이 본래 자리에 본래의 모습으로 서 있다. 모자로 얼굴을 덮고 누운 친구에게서 가랑가랑 편안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어쩌면 꿈 속에서 나무 신들과 조우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정지했던 시간이 다시 흐른다. 나무와 돌, 새가 제 각각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뱅골 보리수의 줄기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채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어찌 이 늙은 나무의 언어를 알아 듣겠냐마는 그래도 나무에게 묻는다. 네 천년이 어땠냐고. 돌은 너에게 어떤 존재였냐고. 백년도 안되는 내 삶이 왜 이리 만만치 않냐고. 엄살 떨지 말란다. 만추의 홍시 같은 주홍빛 석양이 나무 사이로 쏟아진다. 그 빛으로 다시 생명을 얻은 타 프롬 사원의 나무와 돌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 보여주기 시작한다.

▲ 홀연히 나타난 빛에 넋을 잃고 이끌려 가다 ⓒ fen


그 빛에 넋을 잃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잃어 버렸다. 바이욘 사원에서의 일몰을 보러 가기 위해 서두르자 했는데…. 뛰다시피하여 서문에 도착하니 소반 혼자 서있다. 주홍빛 투명한 햇살은 그림자를 더욱 길게 만들어 가는 중인데, 여전히 친구들은 찾을 수가 없다. 소반에게 부탁해 사원 안의 관리인에게 무전을 치려는 순간, 석양을 등지고 걸어오는 친구들의 모습이 저만치서 희미하게 보인다.

빛에 홀려 정신을 놓고 들어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중앙회랑의 압사라 부조와 통곡의 방을 지나쳐 버렸다. 이제와 그것들을 보러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 이 다음에 다시 씨엠립에 와야할 이유를 한가지 늘린 셈이다. "따 프롬에서 길을 잃지 않거나 홀리지 않는다면, 그건 따 프롬의 진수를 모르는 거 아닐까. 따 프롬에서는 꼭 길을 잃거나 그렇게 지는 햇살에 홀려 보아야 한다!"고 친구 팬이 말한다.

앙코르 유적지를 여행 중인 모든 사람들이 일몰을 보러 가는,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프놈 바켕이 아닌 바이욘 사원을 향해 달리자 부탁하니 소반의 눈이 동그래진다.

▲ 석양빛에 홀려 미처 보지 못한 중앙 회랑 2005년 1월 ⓒ 이승열


덧붙이는 글 2008년 1월 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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