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검둥이'들의 힘, 미국을 녹색으로 물들이다
[미국문화읽기⑥] '성 패트릭의 날' 행진의 기원과 아일랜드 이민의 역사
▲ 성 패트릭의 날은 이제 종교적 의미를 넘어 대중적인 문화행사로 발전했다. 사진은 매디슨 시의 퍼레이드 장면. ⓒ 강인규
▲ 매디슨 주청사 앞을 행진하는 백파이프 악단. 성 패트릭의 날 시가지 행진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퍼레이드에는 백파이프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 강인규
▲ 녹색 물감으로 물든 시카고 강 풍경. 이 연례행사에는 강물에 영향을 주지 않는 친환경 색소가 사용된다. ⓒ 강인규
시카고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제법 큰 강이 있다. 도시를 관통해 서편 미시건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시카고 강이다. 이 강은 일 년에 한 번씩 녹색 빛으로 바뀐다.
강물만 푸른빛을 입는 것이 아니다. 강이 화려한 변신을 하는 날이면, 강둑과 다리 위는 새벽부터 녹색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붐빈다. 성 패트릭의 날(Saint Patrick's Day)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시카고는 채 봄이 오기도 전에 신록을 맞는다.
봄보다 먼저 찾아오는 녹색의 제전
매년 3월 17일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했던 성 패트릭을 기리는 날이다. 성스럽게 들리는 날이지만, 사실은 할로윈만큼 떠들썩한 축제의 날이다. 절기상으로는 영어권에서 '렌트(Lent)'라 불리는 사순절이나 '이스터(Easter)'로 불리는 부활절과 겹치는 시기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한 경건의 시간이다. 이 금욕의 기간은 보통 요란한 축제로 시작되거나 마무리된다.
지역에 따라 형태는 다르지만, 대개 멀리해야 하거나 멀리했던 음식을 차려놓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행복해한다. 미국에서는 루이지애나 주의 '마디그라(Mardi Gras)'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미국 남부의 지역축제로 남아있을 뿐이다.
반면 '성 패트릭의 날'은 '아일랜드 마디그라'라는 별명을 얻으며 미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대중문화로 발전했다.
이 날이 되면 미국 각지는 녹색으로 치장된 가장 행렬 행사로 떠들썩하다. 사람들은 녹색 모자나 옷을 입고 대낮부터 술집에 들어가 아일랜드 맥주를 마신다. 식당에서는 쇠고기를 소금에 절여 삶은 아일랜드 전통음식인 '콘드 비프(corned beef)'를 내놓고, 일부 술집에서는 녹색 맥주를 팔기도 한다. (이름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콘드 비프'는 옥수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역기서 '콘'이란 '굵은 소금'을 의미한다.)
▲ 시가지 행렬에 등장한 성 패트릭과 그의 초상. 그가 아일랜드에서 뱀을 몰아냈다는 전설이 있지만, 아일랜드에는 과거부터 뱀이 존재하지 않았다. ⓒ 강인규
▲ 샴록은 아일랜드의 국가적 상징이기도 하다. 사진은 아일랜드의 링거스 항공. ⓒ Wikimedia Commons
아일랜드에 뱀이 없는 이유는 성 패트릭 덕분?
이날은 성 패트릭이 타계한 날이다. 그는 1500여 년 전인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살았으며, 아일랜드인들은 그의 사후 오랫동안 이 날을 기념해왔다. 이날은 아일랜드의 공식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성 패트릭은 본래 영국 태생이지만, 14살에 납치되어 아일랜드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는 이 어려움 속에서 신을 만났고, 6년 후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에게 돌아간 후에도 아일랜드를 잊지 않았다. 그는 주교가 되어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신을 전파했다.
그는 아일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일랜드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었지만, 평생을 청렴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었다. 성 패트릭은 오늘날 아일랜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성 패트릭과 연관되는 두 가지 이미지는 '샴록(shamrock)'이라 불리는 작은 클로버와 뱀이다.
성 패트릭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클로버를 썼다고 한다. 하나의 줄기에 잎에 세 개 붙은 샴록은 '삼위일체(trinity)'를 설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였을 것이다. 게다가 클로버는 이미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성스러움의 표상이었다. 봄이 찾아오기 무섭게 들판을 수놓는 클로버는 새로운 생명과 기운을 의미했다.
다른 하나는 뱀으로,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의 뱀을 모두 쫓아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일랜드에 뱀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대륙에서 떨어진 섬으로, 성 패트릭 이전부터 뱀이 존재하지 않았다. 뱀은 '이교'를 몰아낸 기독교의 은유적 의미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지금은 누구나 아일랜드인이 돼볼 수 있지만
성 패트릭의 숭고한 삶을 기리는 전통은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날이 종교적 의미를 벗어난 대중문화의 형태로 발전한 데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이날의 상징이 된 '성 패트릭의 날 가장행렬(Saint Patrick's Day parade)'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미국이었다.
1762년 3월 17일, 뉴욕시에 주둔하던 영국군 소속의 아일랜드 병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한 것이 계기였다. 그들은 타국 땅에서, 그것도 영국 국기 아래 복무해야 했던 한 많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의 이 작은 '뿌리찾기' 노력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위안을 주었으며, 아일랜드 이민자 증가와 더불어 이 행사의 의미는 점차 커졌다.
성 패트릭의 날에 길을 거닐다 보면 거리와 상점에 "3월 17일에는 모든 이가 아일랜드인이다"라는 글귀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간혹 "나는 아일랜드인이니, 키스해 줘요(Kiss Me, I am Irish)"라는 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치장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모든 이가 아일랜드 혈통은 아니다. '모든 이가 아일랜드인'이 되는 날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은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아일랜드인이 되어볼 수 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이름은 저주와 차별의 상징이었다. 일제 치하의 '한국인'과 나치 독일의 '유대인,' 그리고 미국의 '흑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흰 검둥이"... 백인도 피하지 못한 인종차별
영국인들의 잔혹한 압제와 흉년의 배고픔에 고통 받던 아일랜드인들은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대거 늘어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845년에 시작되어 5년 가까이 계속된 대기근 때문이었다.
굶어죽은 사람이 110만 명이 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식량을 찾아 아일랜드 땅을 떠났다.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인구가 대기근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꿈을 품고 찾아온 '신세계'에서는 인종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인'이라야 결국 같은 이민자들이었으나, 이들은 먼저 왔다는 이유만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찾아온 아일랜드인들을 조롱하고 모욕했다.
▲ 1849년에 그려진 한 아일랜드 가족의 모습(왼쪽). 1845년부터 5년 간 지속되었던 감자흉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죽거나 이민의 길을 떠났다.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 그들은 '흰 검둥이'로 불리는 인종차별을 겪었다. 오른쪽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차별을 기록한 저서 <아일랜드인은 어떻게 백인이 되었나>. ⓒ Taylor & Francis
차별당한 이유는 그들의 언어가 '영국 영어'와 다르고, 무식하고 교양이 없으며, 잘하는 것이라고 술 마시고 싸우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종교적인 차이도 문제가 되었다. 개신교가 지배적인 미국사회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가톨릭을 믿는 이방인이었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단일한 무리로 묶고, 그 집단의 특성을 부정적인 몇몇 단어로 단순화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첫 단계다. 인종차별의 다음 단계는 그 특성에 타고난 '천성,' 즉 유전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에서 "흰 검둥이(white negro)"가 되었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근거 없고 비이성적인 모략인지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차별은 계속 되었고, 이들이 미국에서 시작한 '성 패트릭의 날 행진'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아일랜드인들의 술주정'이라는.
정치적 연대, 오늘의 존경을 낳다
▲ 성 패트릭의 날에는 아일랜드가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 강인규
성 패트릭의 날이 모든 미국인이 즐기는 인기 있는 축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랜 과거가 아니다.
아일랜드인 이민자 수가 증가하고 이들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성 패트릭의 날의 의미도 서서히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아일랜드인의 정치적 연대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모여 함께 투표장으로 향하는 한 어떤 유력 정치인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은 단합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그 결과 '녹색 기계(Green Machine)'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치인들은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하나둘 성 패트릭의 날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축사를 건넸다. 이미 불어나기 시작한 구경꾼들의 수도 정치인들에게는 큰 유혹거리였다. 1948년 행사 때는 트루먼 대통령이 이 대열에 가담했다. 아일랜드 후손이 미국에서 이룬 전통이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었음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뉴욕에만도 성 패트릭 행진을 보기 위해 매년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 시카고·밀워키·보스턴 등 대도시는 물론, 작은 마을의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더하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이제 이날은 종교·인종·지역, 문화권에 상관없이 누구나 즐기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매년 돌아오는 이 성 패트릭의 날은 운명에 굴하지 않고 싸워온 한 민족의 자랑스러운 투쟁의 기록이다.
착취, 편견, 그리고 차별을 이겨내고 오늘을 이룬 아일랜드 사람들. 나는 그들을 위해 기네스 잔을 든다.
▲ 아일랜드 전통 무용을 공연하는 소녀들의 모습. 과거 미국에서는 아일랜드의 전통과 풍습이 '열등'과 차별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널리 존경받으며 대물림되면서 미국의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 강인규
▲ 시가지 행진을 구경하고 난 사람들이 아일랜드식 술집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다. 성 패트릭의 날은 미국인들이 낮부터 술을 마시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드문 날 가운데 하나다. ⓒ 강인규
▲ 아일랜드의 맥주 기네스(Guinness). 아일랜드의 '펍'에 가면 기네스 맥주 거품 위에 '샴록'을 그려주기도 한다. 이 회사는 세계 최고의 기록을 모아놓은 '기네스 북'을 발간하기도 했다. ⓒ 강인규
▲ 성 패트릭의 날에 행진과 공연을 즐기는 미국인들. 성 패트릭의 날은 차별을 극복하고 종교와 국적을 넘어선 대중적인 문화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정치세력화가 큰 역할을 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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