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섭, '불출마 선언'으로 날개 펴다?
'기득권 포기'로 당내갈등 잠재워... 이명박·이상득과도 묘한 대립각
▲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23일 저녁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8대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 이종호
"뉴스 보셨어요? 예, 예. 저는 뭐 이미 발표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당이 스타트하는데 시끄러워서요."
23일 저녁 7시 30분경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기자실.
대화 상대는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 이 대통령이 강 대표의 불출마 소식에 "25일 주례회동이 있으니 그 때 다시 얘기하자"며 대표를 만류해보려고 했지만, 강 대표는 "모레는 이미 다른 사람을 구해서 등록해야 한다, 당이 어수선하니 누군가 정돈해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강 대표는 "대통령도 '내 팔다리가 다 잘려 속상하다'고 하더라"며 "대통령이 '공천은 공심위에서 했는데 대표가 왜 혼자 책임지려고 하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공천을 둘러싼 잡음이 자신의 사퇴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걸 대통령의 언명을 소개함으로써 다시 한 번 강조한 셈이다.
불출마는 전가의 보도? 그의 화려한 마무리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계 후보들의 연이은 기자회견으로 인해 한나라당이 하루종일 어수선한 날이었지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강 대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당내 분란의 해소 전망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대표가 불출마하겠다는데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냐?" "대표가 그만뒀으니 다 해결된 것이다"라고 답하는 등 자신의 불출마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들어온 강 대표는 이번 불출마 선언으로 의정생활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같은 시기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박희태·김덕룡 의원이 예상 밖의 공천 탈락으로 허무하게 정치권의 뒷무대로 밀려난 것을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화려한 마무리'를 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과 여당 견제론의 부상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총선 과반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당 대표가 기득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권 공천을 내던진 것에도 호의적인 여론을 기대해볼 만하다.
한나라당이 총선에 내놓을 '간판스타'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살신성인'을 부각시킴으로써 견제론의 파고를 넘을 심산이다. 강 대표는 "만약 총선에서 과반을 확보 못하면 대표의 책임"이라며 과반수 확보에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
그러나 강 대표의 불출마 선언이 다소 '생뚱맞은 이벤트'로 비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명박계 후보들이 '강재섭 불출마'가 아니라 '이상득 불출마'를요구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강 대표는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거취에 대해 "공심위가 결정했으니 따라야 한다. 대통령이 이상득 국회의원을 시켜준 게 아니지 않냐"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당을 이끌 원로그룹이 대거 퇴진한 가운데 노·장·청의 조화를 위해서라도 이 부의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했다.
'5선 동기' 이상득의 미래는
▲ 당선자시절 이명박 대통령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자 사무실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자료사진). ⓒ 한나라당 제공
강 대표를 비롯해 이상득 부의장, 김덕룡·박희태·정몽준 의원은 1988년 총선에서 나란히 국회에 들어온 '5선 동기생'들이다. 이중 김덕룡·박희태 의원이 공천 탈락한 가운데 강 대표까지 불출마하면 당내 5선 의원은 이 부의장과 정 의원 둘만 남게 된다.
줄곧 무소속으로 있다가 당에 들어온 정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울산을 떠나 서울에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강 대표까지 대구 공천을 포기한 마당에 이 부의장만 한나라당 텃밭인 경북 포항에 남아 정치 생명을 부지한다는 비판에 봉착하게 된 셈이다.
강 대표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이 부의장이 자신의 경험을 국가를 위해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런 분이 3부요인으로 국회의장 이런 걸 할 수는 없다"고 '이상득 국회의장 불가론'을 넌지시 내비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나라당의 '5선 그룹'에서 이 부의장이 국회의장을 맡지 못하게 되면 여당 몫의 국회의장 자리는 차기 총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김형오 의원(4선)의 몫이 될 공산이 크다. 강 대표의 발언은 이 부의장을 옹호하면서도 그의 정치적 활로를 제어했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셈이다.
강 대표가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책임 있는 직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공천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파격'으로 다가온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비례대표 상위순번으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뜻에 거스르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 셈이기 때문이다. 당내 소장파들이 '인수위 책임론'을 들어 청와대와 당 지도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강 대표도 이들과 뜻을 같이 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청와대의 대응이 주목된다.
'기득권을 내던진 당 대표'로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상황에서 당장 25일로 다가온 대통령과의 주례회동에서도 과거와 다른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리고, 대권의 꿈은 계속 된다
강 대표는 2007년 대선 레이스에 잠시 뛰어들었다가 이명박·박근혜 '빅2'의 위세에 눌려 꿈을 접고 당 대표로 변신했다. 그러나 강 대표의 대권 도전이 '1회성 해프닝'으로 끝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 대표가 2003년 병역면제 처분을 받은 아들을 해군에 자원입대시킨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아들들의 병역문제로 낙마한 것을 본 뒤 강 대표가 아들과 상의해 그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그의 측근들도 "너무도 철두철미한 행동에 놀랐다"는 말이 나왔다.
2006년 대표 취임 이래 양대 계파에 시달렸던 강 대표는 18대 총선을 맞아 마침내 자신의 정치를 할 기회를 다시 맞이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웅지를 펼 기회가 주어질 지는 '총선 과반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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