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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의 꿈, 팔백년을 미소짓고 서 있더라

[캄보디아 씨엠립 여행4] 넉넉한 바이욘 사원에서 마주한 고요

등록|2008.03.25 14:06 수정|2008.04.01 14:29

▲ 낮의 바이욘, 밤의 바이욘.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바뀐다 ⓒ fen, 이승열


따 프롬의 석양빛에 홀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바이욘 사원에 잦아드는 노을빛의 각도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는 앙코르의 미소를 보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토록 차를 아끼면서 '사알사알' 운전하던 소반조차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는지 '쌩쌩' 속력을 낸다. 밀림이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너무 늦었다고 낙담할 일도, 포기할 일도 아니다. 길이라 믿고 가보면 끊겨있기도 하고, 또 주저앉는 순간 다른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계획했던 대로 굴러간 적이 몇 번이나 됐던가. 생각은 그리 느긋한 중에도 이미 내 몸은, 마치 기록을 위해 치닫는 100m 달리기 선수처럼 바이욘 사원의 3층 사면상(四面像)을 향해 두 계단씩 서둘러 올라간다. 숨은 가쁘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그러나 야속한 태양은 벌써 밀림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춘 후였고, 노을만이 엷게 남아있다.

▲ 앙코르와트 무희들의 발이 옆을 향해 부자연스러운 것에 반해 바이욘 무희들의 발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 fen


▲ 지금도 춤을 추고 있는 바이욘의 무희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무희들의 동작을 연결해 현재의 압사라 춤을 복원했다고 한다 ⓒ fen


사람들이 모두 떠난 바이욘 사원에는 오로지 적막 만이 남았다. 백여 개가 넘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인 자야바르만 7세의 사면상이 푸른 어둠 속에서 한낮과는 다른 표정으로 우리들을 맞는다. 먼 데서 온 무례한 여행자들이 이 적막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혹 벽 속 맨 발의 무희들을 불러내 교교한 달빛 아래서 무도회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위용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던 큰 바위 얼굴들의 표정에 조금씩 익숙하고 편안해진다. 눈을 마주치면 그저 쑥스럽게 웃기만 하는 이곳 캄보디아 사람들의 코 평수 넓어 선한 얼굴이 큰 바위 얼굴에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서글서글한 눈매, 입술 양끝을 살짝 올리며 짓는 소박한 미소, 빛에 따라 때론 엄숙하게, 때론 자애롭게 변하는 얼굴이 그곳에 있다. 백여 개의 얼굴이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왜 앙코르의 미소라 칭하는지 조금은 알 듯도 하다.

▲ 넓은 이마, 끝이 살짝 올라간 두툼한 입술, 넓은 코평수의 캄보디아 사람들을 닮은 사면상. 54개가 넘는 사면상, 즉 200개가 넘는 큰바위 얼굴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39개의 사면상 뿐 ⓒ 이승열


하늘과 밀림, 사면상을 또렷하게 구분지었던 푸른 어둠이 점점 더 짙어져 간다. 천년을 하루처럼 묵묵히 서 있는 저 관세음보살의 현신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이 이룩했던 앙코르 제국의 영광과 몰락, 그 와중에 숱하게 일고 스러진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까?

동서남북, 그 각각의 길이가 3km, 둘레 12km에 이르는 정사각형 앙코르 톰(Angkor Thom)은 거대한 도시란 뜻의 크메르 왕국 마지막 도읍지였다. 현재 실측해도 네 변 길이의 오차가 5mm 이내라 하니, 계절에 따른 수축과 팽창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열대 기후였다고는 하나, 건물과 다리가 맥없이 무너지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당시 그들의 건축술에 경이와 찬탄을 보낼 따름이다. 당시 중국 원나라 사신으로 앙코르 톰을 찾았던 주달관의 기록을 보면서 찬란했던 앙코르 톰의 위용을 짐작해 본다.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 탑(바이욘)이 우뚝 서 있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들과 돌로 만든 수백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에는 황금사자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는 황금 다리가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황금 불상 8개가 돌로 된 방을 따라 늘어서 있다. 청동으로 된 황금 탑(바푸온)의 북쪽에는 바이욘보다 더 높아 보이는, 아래에 10개가 넘는 방이 있는 탑(삐미아나까스)이 있다. 이 탑의 북쪽 4분의 1리쯤에 왕이 기거하는 왕궁이 있다. 왕실 위에도 황금으로 된 탑이 있다. 이 탑들을 보고 외국에서 온 상인들마다 앙코르 제국은 참 부유하고도 장엄한 나라라며 감탄했다.'

성 안팎으로 인구 백만이 살았던 거대한 도시 앙코르 톰의 정 중앙에, 내가 지금 서 있는 바이욘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비견되는 자야바르만 7세는 1170년 똔레삽에서 있었던 참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왕위에 오른 뒤, 왕가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기득권 세력의 견제와 맞서야 했다.

▲ 관세음보살로 현신한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 그는 초기 힌두 사원위에 불교 사원을 세웠다 ⓒ 이승열


기존의 힌두교를 버리고 대승불교를 받아들인 후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스스로에게 신성을 부여한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 톰 정 중앙의 바이욘 사원은 그에게 새로운 제국, 새 시대를 펼칠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가 건설하고 완성한 제국, 영원을 꿈꿨던 왕국의 수호신으로 모든 중생이 해탈한 뒤 성불하겠다고 서원한 관세음보살을 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수많은 병원을 짓고, 빈민구제 시설을 건설해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이미 신성을 인정받은 그였다. 모든 앙코르 유적이 힌두 사원인데 반해 바이욘 사원만이 유일한 불교 사원인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뒤, 불교는 다시 힌두교로 환원되고, 라오스 국경까지 확장되었던 대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 어둠이 오는것을 이렇게 긴 시간 지켜보는 것이 생애 몇번이나 존재하던가 ⓒ fen

힌두교의 대표적 건축물인 앙코르와트가 선뜻 다가가기 힘든 위엄을 가졌다면, 바이욘 사원이 주는 편안함은 아마도 건축 당시의 이런 분위기가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씨엠립의 대표적인 무료 어린이 병원에 자야바르만 7세의 이름을 쓴 것만 보아도 그의 치세가 후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 그에 대한 애정이 지금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새들마저 모두 둥지에 든 시간, 풀벌레의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인 바이욘 사원은 완전한 고요 속으로 든다. 아니 고요 그 자체가 된다. 사원 벽에 기대 앉은 나는 사원의 정물 하나가 된 듯하다. 고요 속에서 감지되는 것은 오직 내 들숨과 날숨, 맨발에 닿는 돌의 감촉 정도이다. 서울이었다면, 하루도 빠짐없이 그러하듯, 오늘은 또 저녁으로 뭘 해먹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을 시간, 밤의 푸른빛 경계와 하나가 되어 아무 걱정없이 이토록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니. 그리 오래 전도 아니건만 떠나온 서울이, 떠나기 전 공항 의자에 누워 좋지 않은 몸을 추스리던 나 조차도 아득히 먼 기억 같기만 하다.

▲ 본래부터 그 자리인듯, 미동조차 없는 바이욘 유적 관리인.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시간이 이미 지났음을 알려주는 것 ⓒ 이승열


사면상의 숲에서 본래 그 자리에 존재했던 듯 미동도 없던 관리인이 시간이 다 됐음을 알린다. '이 음악이 끝날 때까지만, 딱 한번만 더 듣고'를 말하는 여행자들에게야 오늘이 특별한 날이겠지만, 그들에겐 일 년 열두 달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귀찮을 일상일진데 얼굴 한 번 찡그리는 법이 없다. 사위가 어둠 속에 묻히고서야 일어서니 플래시를 든 소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앙코로 톰 안의 오솔길, 순도 100%의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앙코르 톰 남문으로 다시 나오니 앙코르와트 연꽃 위에 뜬 보름달이 해자 안에도 떠 있다. 잠시 차를 멈추고 그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덧붙이는 글 2008년 1월 말 다녀왔습니다. 사진 중 일부는 fen의 동의를 얻어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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