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카페인 부족이거든, 커피 한 잔 안 될까?"

인생에서 빼기로 작정한 것 하나, 커피 줄이기

등록|2008.03.25 15:16 수정|2008.03.25 16:55
새해가 시작되던 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올해에 더하고 싶은 것, 빼고 싶은 것, 갑절로 하고 싶은 것, 줄이고 싶은 것들을 정했었다. 나 역시 한 해 소망이자 계획을 세우는 셈치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몇 가지를 마음에 담고 가족들에게 전했었다.

"먼저 올 해 더하고 싶은 것은 은혜(딸)·요한(아들), 엄마하고 함께 하는 시간이야. --중략-- 그 다음 빼고 싶은 것은, 커피와 몸무게야. 커피는 하루에 몇 잔을 마시는지 모를 만큼 많이 마시고 있는데, 하루 한 잔 이상 마시지 않도록 해 볼게.--이하 생략"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하지 않을 것들, 인생에서 뺀다고 해도 큰 불편이 없을 듯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거의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빼기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지목했다.

커피의 유혹이랄까.부슬비내리는 날 베란다에 놓인 커피 두 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아닐까. ⓒ 고기복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빈속에 한 잔, 아침 먹고 한 잔, 사무실에 도착하면 또 한 잔, 점심시간까지 심심할 때마다 일어서서 한 잔, 점심 후에 한 잔, 저녁 먹고 한 잔, 자기 전에 한 잔 등등 거의 쉬는 시간마다 손에 커피를 달고 마셨다고 할 만치 많은 커피를 마셨었다. 그런 나도 대학 다닐 동안 커피숍에 갔던 기억이 거의 없는 걸 보면, 학창 시절에는 커피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커피에 절어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커피가 중독성이 없다고 하니, 중독이라 하긴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습관적으로 마시는 것이 의지와 상관없이 마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커피 한 번 줄여봐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됐다. 하지만 그 동안 즐기던 커피를 전혀 안 마시겠다는 장담은 못하겠고 해서, ‘하루에 한 잔 이하를 마신다’고 정했다.

그렇다고 '한 방에 끊지, 한 잔을 남겨놓을 건 뭐냐' 시비 걸지 마시길. 누군가 의견을 묻지 않고 내놓은 커피는 버리기도 아깝고, 내 온 사람 성의도 있고 하니 외면한다는 게 너무 매몰차지 않은가? 게다가 사람이 모질게 완전 끊기는 쉬워도, 한 잔의 여유를 남겨 놓고 그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 잔을 남긴 이유는, 커피를 줄이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고 싶은 부분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커피 줄이기 계획에 따라, 오늘까지 87잔을 마셨다. 새해가 시작된 일수와 비교하면 두 번에 걸쳐 하루 한 잔 이상을 마신 셈이다. 한 번은 노동부 근로감독과 방문이 있었을 때, 같이 갔던 직원이 커피 자판기에 천 원짜리를 넣고 커피를 뽑는데 잔돈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잔돈 버리기 아까우니 커피를 마시라’며 뽑아 와서 마셨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공짜로 마실 수 있도록 놔둬도 될 텐데, 굳이 커피를 빼 올 건 뭐냐"고 하면서도 나름 심심하던 터라, 받아 마셨었다.

또다른 한 번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떠나려는데, 주유소 직원이 '에스프레소 커피'를 들고 나와 건네는 통에 받아 마셨었다. 주유소를 나오면서 보니 들어갈 때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5만 원 이상 주유 고객에게 에스프레소 커피 테이크아웃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현수막에 적혀 있었다. 덕택에 크림거품이 보드랍게 떠 있는 커피 잔을 들고 오랜만에 진한 향기의 커피를 조금씩 음미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호사라고 한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순간순간 커피 생각이 간절했었고, 누군가에게 "나 지금 카페인 부족이거든, 커피 한 잔 안 될까?"라고 말을 걸고 싶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새해가 시작되고 석달이 지난 요즘도 가끔씩 습관적으로 커피를 타려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습관에 길들여진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 덕택에 지금까지는 ‘카페인 부족’이라는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고, 커피 없이도 인생사는 데 큰 불편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나면, 앞으로 내 인생에서 커피를 완전히 뺄 것인지, 조금 여유를 두고 더하기를 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건 아이들 앞에서 했던 약속, 비록 ‘하나’라 할지라도 제대로 지킨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 아홉 달 열흘 정도가 남았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