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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속 티베트는 뜨거웠다

[북경수첩 제2쪽] 티베트계 라마불교사원 옹화궁의 풍경 스케치

등록|2008.03.26 16:38 수정|2008.03.26 18:32

▲ 티베트계 라마교 사원인 옹화궁의 입구. ⓒ 김종성


한동안 황사가 불면서 몹시 쌀쌀했던 북경 날씨가 다시 따스해지고 있다. 지난 23일 일요일,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옷을 좀 껴입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가 따뜻한 날씨로 인해 여간 거북스러웠던 게 아니다. ‘북경 속 티베트’ 속에서 느낀 열기로 그날처럼 옷이 거북했던 적도 없을 것이다.

‘북경 속 티베트’란 북경에서 티베트 문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인 옹화궁(용허궁)을 말하는 것이다. 새로 개통된 북경 지하철 5호선과 기존 2호선의 환승역인 옹화궁역에 붙어 있는 티베트식 라마불교 사원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북경시 동성구(동청취)에 속하는 곳이다. 

▲ 옹화궁 내 법륜전의 불상. ⓒ 도록 <옹화궁>


옹화궁의 유래를 이해하려면 옹화궁의 옹(雍)자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본래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세종 옹정제(재위 1722~1735년)가 살던 집이 훗날 라마교 사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옹화궁이 처음 세워진 때는 강희 33년(1694)이었다. 당시에는 제4대 황제 강희제 치하에서 황제 즉위 이전의 옹정제를 위한 옹친왕부로서 세워졌다. 이것이 옹정 3년(1725)에 행궁으로 발전했다가 다음 황제 때인 건륭 9년(1744)에 라마교 사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는 조선 영조 24년으로서 정조 이산이 출생하기 8년 전이었다.

▲ 옹화궁 조감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빈 공간이 줄어들면서 건축물 크기는 높아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 도록 <옹화궁>

전체적으로 볼 때에 옹화궁은 좀 특이한 건축구조를 띠고 있다.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 하에,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당이 점점 좁아지면서 건물 크기는 점차 높아지는 색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차 숨이 막힌다는 느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다른 관광객들과 몸이 좀 더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북경 외문출판사(와이원출판사)가 발행한 도록 <옹화궁>에 따르면, 이것은 중원지역에서 발전한 전통적 건축양식 중 하나라고 한다.

그 같은 특이한 건축구조 외에,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관광객들의 참배 의식이다. 이곳이 관광지가 아니라 참배지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옹화궁 곳곳은 향불을 들고 절을 올리는 참배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정문에서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그런 참배객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라마승들은 그저 불상을 관리하는 역할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마승들은 그저 참배객들을 보조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의 유명 사찰들에서 스님들이 관광객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 라마교 스님들의 모습. ⓒ 김종성


어떻게 참배를 하나 하고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한국 사찰의 풍경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사찰에서 절하는 방식이 좀 복잡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참배는 향을 구입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옹화궁의 안팎에 있는 기념품 상점들에서는 보통 2위엔(약 280원) 정도에 향을 팔고 있었다. 한 번 절할 때마다 보통 3개의 향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물질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그냥 빈 손으로 절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향의 크기는 제각각 달랐다. 아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물질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작은 향을 들고 절을 올리면 왠지 정성이 좀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우스개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향을 딱 세 개만 들고 절을 하는 데 비해, 3개가 아닌 세 묶음을 들고서 거창하게 절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라는 게 많은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향불을 들고 절하는 사람들. ⓒ 김종성


각 마당마다 절하는 곳이 세 군데 정도 있었다. 각각의 마당 안에는 정면을 향하고 절을 할 수 있도록 한 곳이 한 군데씩, 측면 담을 바라보고 절을 할 수 있도록 한 곳이 두 군데씩 있었다. 그리고 절하는 곳에는 통 2개와 무릎받침이 하나씩 있었다.

통 하나는 향에 불을 붙이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통은 절을 올린 다음에 불붙은 향을 버리기 위한 것이다. 통 속에 뭐가 들었나 싶어서 얼굴을 가까이 댔다가 그 뜨거운 기운에 얼른 얼굴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기운이 거칠게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받침은 절할 때에 무릎을 대기 위한 것으로써 그 재료는 돌이었다. 다만 법당 내의 무릎받침에는 스펀지가 얹혀 있었다. 향에 불을 붙인 참배객들은 무릎받침에다 무릎을 꿇은 뒤에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기원한 다음에, 세 번 절을 올리고 그런 후에 불탄 향을 큰 통에 넣곤 하였다. 세 번 이상 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절을 할 때에는 향에 불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옹화궁 곳곳은 그야말로 화재 위험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불이 자칫하면 대형 화재로 번질지 모를 정도로 ‘북경 속 티베트’는 ‘위험한 존재’였다. 

▲ 불타는 향로. 절이 끝난 뒤에 향을 버리는 곳이다. ⓒ 김종성


옹화궁을 찾기 전에는 그 이름 자체가 약간 신비롭기도 하지만 라마교 사원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방문해보니, 사방에 온통 참배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신기해하면서 카메라를 찍어대는 서양인들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경내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참배객들이 많이 몰린 곳은 연기가 자욱하기도 했다. 게다가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공간이 좁아짐과 동시에 법당이 높아지기 때문에 연기가 빠져나갈 공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 같았다.

티베트계 라마교 사원인 옹화궁을 관람하면서, ‘중국 문화의 원천이 다양하구나’, ‘현대의 중국에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고 있구나’라는 지극히 새삼스러운 생각을 가지는 한편, 무엇보다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저 ‘불길’의 기운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공연한 걱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경내 곳곳에 연기가 가득하다. ⓒ 김종성


북경 속 ‘티베트의 불길’은 저처럼 뜨거운데, 그래서 ‘티베트의 불길’로 인한 ‘3월의 연기’는 해소될 공간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수로 ‘티베트의 몸부림’을 진정시킬 것인가? 그런 공연한 걱정 말이다.

옹화궁 경내에 있는 단 몇 개 밖에 안 되는 소화기구로는 결코 끌 수 없는 ‘티베트의 불길’. 임기응변으로 끄고자 한다 해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향불을 올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티베트의 불길’은 앞으로도 계속 번지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수로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추울 줄로만 알고 두껍게 껴입고 나간 관광객은 옹화궁의 뜨거운 불길에 낯설음을 느끼면서 ‘저 불길도 지금 나만큼이나 답답하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돌아왔다. ‘북경 속 티베트’는 3월 날씨에도 무척이나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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