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롱쉐샨(옥룡설산)북반구 최남단에 위치한 만년설산. 인간의 정복을 거부한 처녀봉우리. ⓒ 박경
하얗게 이마가 빛나는 위롱쉐샨(玉龍雪山)을 향해 달려간다. 작은 버스 안은 중국인 관광객들과 설산 풍경구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꽉 차 있다.
시내를 막 벗어날 즈음 버스는 어느 가게 앞에서 선다. 차장 아가씨가 나에게 뭐라고 뭐라고 다급하게 외쳐댄다. 가게와 아가씨의 목젖을 번갈아 보던 나는 섬광처럼 떠오르는 게 있어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버스에서 내려 문도 없는 가게 앞에 섰다. 점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산소통을 내놓는다. 두 개에 100위안.(1위안=133원 정도)
설산에서 요긴한 산소통
윈난 여행을 계획할 때 제일 걱정되고 기대되는 것이 고산증세였다. 기압이 높아지면서 산소가 부족해지면 호흡이 불편하고 어지럽고 구토증세가 일어나 심하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데 여행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가장 하늘에 가까이 다가설 텐데 과연 내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기대.
따리, 리장, 샹그릴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해발고도는 자연스럽게 적응이 될 테고,
고산증세를 맛 볼 수 있는 기회라면 리장에서의 설산행일 거라고 은근히 기대했었다.
인터넷 카페에서는, 고산병 예방에는 비아그라가 최고라느니 열흘 전에 홍경천을 먹으라느니 나름의 비법들이 올라왔지만 우리의 일정으로 보아 큰 무리는 없을 듯 싶어 무시했었다.다만, 해발 4500m에 이르면 거의 100%가 고산증세를 보인다 하니, 산에 갈 때만큼은 꼭 산소통을 사야지, 마음 먹었었다.
에프킬라 통 같은 산소통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후다닥 버스에 다시 올라탔는데, 이상하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산소통을 구입하지 않았다. 우리가 옷자락 휘리릭 날리며 산소통을 사 올 때까지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중국인들은 다른 비법이 있는 걸까? 별로 필요치도 않은 걸 우리만 요란 떨며 산걸까? 그 이유는 오래지 않아 밝혀진다.
위롱쉐샨 풍경구 안에는, 빙하를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빙천(氷川)공원과 빙하가 녹아내린 백수하, 아름다운 고산초원이 펼쳐지는 운삼평과 설산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모우평이 있다. 하루에 다 돌아볼 수는 없어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초원의 멋진 풍경을 사진에서 보고 운삼평을 가기로 마음 먹은 우리는 차장 아가씨에게도 '윈썬핑'을 간다고 말해놨었다.
풍경구 안으로 들어온 버스가 서자, 우르르 관광객들이 내리고 우리는 여기가 어딘가 어리벙벙한데, 차장 아가씨가 양떼 몰듯이 마구 손짓을 한다. 우리도 얼떨결에 내려버렸다.
어라? 운삼평인줄 알고 내렸는데 빙천공원가는 길이다. 위롱쉐샨의 자태가 한눈에 펼쳐진다. 에라! 그냥 빙하 보러 가지 뭐.
빙천공원은 다시 여기서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를 타고 설산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케이블카 티켓을 사려고 줄을 서는데 아뿔사! 똑같은 산소통이 하나에 40위안. 우리는 20위안이나 바가지를 쓴 것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버스 안의 중국인들은 다들 그걸 알고 있었던 걸까. 더 비싼 줄 알면서 그걸 사라고 부추긴 차장 아가씨는 또 뭔가. 아무도 우릴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수군거리지도 않았다. 참 묘한 사람들이다. 보면서도 안 본 척 들으면서도 안 들은 척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비싸게 주고 샀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아까운 마음에, 산소통을 한 개만 사서 셋이 나누어 쓸 걸 괜히 후회도 된다. 하지만 설산에서 산소통은 위력을 톡톡히 발휘하게 된다.
케이블카는 무척이나 가파르게 올라갔다. 마치 내가 줄타는 광대가 된 것처럼 아슬아슬 스릴을 느낄 정도였다. 해발 3200m에서부터 케이블카를 타고 1300m 가량을 더 올라가는 듯싶다. 비죽비죽 솟은 빙하가 다가와 발 아래로 지나간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주변이 온통 눈으로 둘러싸여 눈이 부시다. 선글라스를 준비하지 않은 게 조금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산소통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고 있다. 나는 아직 견딜만하다. 산소가 조금 희박해진 듯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이제 이 눈길을 밟고 4680m 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올라가는 길이 어렵진 않지만 금방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산소통을 입과 코에 대고 칙칙 눌러주면 신기하게도 숨결이 되살아났다. 흐아흐아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바퀴벌레 잡듯 산소통을 칙칙 눌러주면 생생해진다. 마치 태엽 감아준 인형처럼 또랑또랑 살아난다. 바가지 쓴 20위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순간이다.
산소통 하나 없이 숨 가쁜 고통을 견디며 올라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기사 올라가는 길이 그리 멀고 험한 것도 아니니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올라간다면 산소통 없이도 견딜 수 있겠다 싶다.
▲ 설산 오르는 길은 멀거나 험하지는 않지만 산소가 희박해 숨이 좀 찰뿐. ⓒ 박경
해발 4680m에 이르고 보니 아래, 위 온통 눈이 부셔 눈 둘 데가 없다. 발 아래는 새하얀 눈 때문에 머리 위는 찬란한 태양빛 때문에. 봉우리 뒤쪽에서 햇살을 쏘아대는 통에 감히 산봉우리를 눈 바짝 뜨고 마주 대할 수가 없다. 숨은 찬데 시야는 왜 이리도 투명하고 맑게 펼쳐지는지.
적도와 가장 가까운 설산이라는 위롱쉐샨. 13개의 봉우리 중 주봉은 5596m라는데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봉우리라고 한다. 나시족의 성산으로 우뚝 솟은 위롱쉐샨은 그렇게나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대 산에 왜 오르는가
내려오는 길에 만년 빙하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발을 디뎌보고 싶다. 저기 어디쯤에 크레바스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끊임없이 오르고자 하는가. 꼭대기에 뭔가 특별한 게 있으니까? 올라가서 내려다 보기 위해? 아니면 남들이 다 올라가니까 그냥 휩쓸려서? 그런데 그거 중요하다. 남들 다 올라가는데 안가면 혼자 남게 되는 거다. 그게 두렵고 외로운 거다.
▲ 빙하눈이 내리고 눈이 얼고, 그 얼음이 밀려내려 온 흔적. ⓒ 박경
그런데 위롱쉐샨은 왜 올라가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려가기 위해서. 내려가는 일이 신나고 재미있어서. 왜냐. 20위안을 내면 커다란 타이어에 엉덩이를 걸친 채 눈을 타고 내려간다.
줄줄이 타이어 썰매를 타고 뒷사람의 뻗은 발을 내 옆구리에 차면 안정감 있게 연결이 된다. 출발신호와 함께 환호를 지르며 설산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함성은 눈 속으로 흩어지고 제법 스릴 있는 속도감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다. 그러다가 속도가 주춤할 무렵 U자형으로 휘어지면서 떨어지는 재미를 더해 준다.
세상에, 해발 4600m에서 눈썰매라니. 제아무리 굳은살 박힌 아줌마라도 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놀이기구 타듯 쪼르르 다시 올라가 또 타기는 민망해서, 아쉽지만 한번으로 족하기로 했다.
▲ 설산에서의 썰매해발 4600m에서 줄줄이 엮인 타이어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맛, 쥑인다! ⓒ 박경
내려가는 일이 이렇게 신이 난다면 올라가볼 만도 하겠다 싶다. 어차피 내려갈 일이라면 신나게 재밌게 내려가는 게 좋겠다 싶다. 살다가 언젠가는 내게도 내려가야 할 순간이 닥치겠지. 그 시간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두려워진다.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 반도 못 올라왔다고,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고 몸부림칠 것인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암벽에 매달려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것인가.
올라가는 일보다 중요한 게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올라가면서는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生)의 내리막길을 썰매타듯 신나게 내려올 수 있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즐겁게 내려올 것인가 고민해야겠다.
그런데 나, 오르긴 올랐던 거 맞아?
너무 신나게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온 바람에 그걸 잊어버렸다.
▲ 백수하설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너무나 깨끗하다. 바닥을 긁어보니 밀가루처럼 하얀 석회질이 묻어난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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