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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을 점령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소설 소현세자 23] 한반도의 지정학

등록|2008.03.27 15:50 수정|2008.03.27 16:12

봉황산.의주에서 심양 가는 길목에 있는 봉황산은 우리나라의 산과 많이 닮아있다. ⓒ 이정근


봉황산을 떠난 세자 일행은 삼가하와 금가하를 지나 통원보에 도착했다. 통원보는 산악지형에 자리잡은 교통 요충이었다. 잠시 휴식한 청나라 군사는 북서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세자 일행도 군대의 이동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초하구를 지나고 연산관에 도착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국경은 압록강이지만 연산관 까지 우리나라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곳이다.

연산관에 도착한 청나라 군사는 전투에 임하는 군대처럼 수레를 정비하고 휴식했다. 단단히 벼르는 모습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군대가 출발했다. 연산관을 빠져 나오자마자 까마득히 높은 산이 눈앞을 가로 막았다. 마운령, 청석령, 낭자산으로 이어지는 1000m 이상의 고원이 시작된 것이다.

말을 타고 가는 세자는 그래도 편안했지만 말을 끌고 가는 마부와 뒤따르는 포로들은 숨을 헐떡거렸다. 발바닥이 부르트고 허기에 지친 포로들이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여지없이 채찍이 날아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청석령 마루턱에 올라섰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장관이었다.

통원보. 의주에서 심양 가는 길목에 있다. ⓒ 이정근


청석령은 만주벌판을 동과 서로 가르는 지붕이었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며 한반도의 등허리가 되듯이 백두산에서 시작한 준령이 발해만을 향하여 달리다가 동쪽으로 압록강을 만들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만드는 분수령에 청석령이 있었다.

마루턱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소현세자는 하늘과 맞닿은 고산준령을 바라보며 이곳을 통과했던 수많은 말발굽소리를 회상했다. 당태종의 명을 받은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이 이곳을 통과했고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수군총관 장량(張亮)이 육로로 이곳을 지나갔다. 지금도 인근에 고려성자촌(高麗城子村)과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이 있다.

오늘날과 같이 대륙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던 원, 명 교체기 때.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했으나 주둔하지 않고 되돌아 온 태조 이성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곰곰 생각해보았다.

백탑보.요동에서 심양 가는 길목에 있다. ⓒ 이정근


요동을 점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동을 점령했더라면 대륙의 판세는 달라졌을까? 원나라와 명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힘의 공백기를 틈타 무주공산 요동을 일시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대륙을 제패한 명나라가 요동 정벌을 용인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불용이면 전쟁이다. 관건은 고려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역사를 상고해보면 달이 차면 기울듯이 어느 나라, 어느 제국을 막론하고 부흥기가 있는가하면 쇠퇴기가 있지 않았는가. 대 제국을 건설했던 원나라는 북으로 밀리고 있었고 명나라는 불꽃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고려는 무신들이 권력에 탐닉했고 불교는 타락하여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려 초라면 가능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쇠퇴기에 들어간 고려는 전쟁수행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공민왕이 주둔군에게 군수품을 공급해주지 않아 군사를 돌린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성계할아버지는 명나라의 대륙 패권을 예견했던 것이다. 판단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다. 피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그 때와 지금이 너무나 흡사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부왕은 어떠한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소현은 마루턱에 흩어져 있는 돌을 주어 만져 보았다. 조국의 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말 못하는 돌이지만 그 때 이곳을 지나던 군사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우 봉림대군의 모습이 보였다.

"게서 뭐하고 있는거냐?"

"네, 저하. 고국에 계신 전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갸륵하구나. 그런데 손에 쥔 것은 무엇이냐?"

"아바마마를 생각하다보니 시상이 떠올라 적어 두었습니다."

"내가 보아도 괞찮겠느냐?"

"네, 저하."
봉림대군은 손에 쥐고 있던 지편(紙片)을 소현에게 넘겨주었다.

청석령(靑石嶺) 디나거냐 초하구(草河溝) 어드매오
호풍(胡風)도 차도 찰샤 구즌 비는 므스일고
뉘라셔 내 행색(行色) 그려 내야 님 겨신 듸 드릴고.
- <봉림대군. 해동가요>

청나라에 끌려가는 조선 왕자의 서글픈 심정을 읊은 시였다.

"너의 비통한 마음을 알겠다만 아바마마께서 우리의 모습을 그림으로나마 보시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겠느냐?"

"망극하옵니다. 저하."

"시종관들에게 보이지 말고 품속에 고이 간직해 두도록 하라."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자일행을 시종하는 신하들이 세자와 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여 고국으로 떠나는 시종 연락관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한성에서 의주까지의 기록은 돌아가는 승지 허계 편에 보냈다. 심양에 도착하면 압록강에서 심양까지의 여정을 기록으로 작성하여 보내야 한다. 그들의 손에 봉림대군의 시가 부왕에 전달되면 가슴 아파 하실 것 이라는 얘기다.

혼하보촌. 혼강변에 있는 촌락이다. ⓒ 이정근


요동을 지난 행렬은 쉬지 않고 서진했다. 청나라 군사들이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요동을 지나면서부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이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아스라이 지평선만 보일 뿐 하루 종일 지나도 산을 볼 수 없었다. 땅과 하늘이 맞닿은 창망함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훗날 이곳을 지나던 연암 박지원이 "울 만한 자리로구나. 한바탕 울어보자(好哭場, 可以哭矣)"고 술회했던 곳이다. 사나이로 태어나 이만한 대지를 품에 안고 울어보는 것은 대장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허나, 소현은 이렇게 드넓은 대지를 밟고서도 감흥이 없었다. 대지를 가슴에 품은 자에게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니포를 지나고 백탑평을 통과했다. 이제 심양이 가까워왔다. 압록강에서 6백리. 열흘 만에 주파한 것이다. 강행군이었다. 한성에서 의주까지 1070리길은 52일 걸렸다. 고국을 떠나는 소현세자에게 많은 배려를 한 것 같았으나 청나라의 속셈은 달랐다. 조선에서 붙잡은 포로와 약탈한 물자를 압록강 밖으로 실어 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다.

혼강.소현세자가 도착한 혼강변에 심수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심수(瀋水)는 혼강의 옛 이름이다. ⓒ 이정근


세자 일행이 혼강(渾江)에 도착했다. 혼강은 한강과 흡사하다. 당시엔 심양 외곽을 흐르는 강이었으나 지금은 심양 한복판을 흐르는 강이다. 심양에 미리 도착한 용골대가 아달개 등 장수 20여명과 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사장에 환영식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어서 오시오. 왕세자."
"환대해주시니 고맙소이다."

"황제가 계시는 성내에서는 여러 왕의 부인들도 가마를 탈 수 없으니 빈궁께서는 말을 타도록 하시오."

"그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오."
시강원 관리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법이고 여기는 대 청국이오. 우리의 국법을 따르시오."
청나라에 왔으니 청나라의 국법을 따르라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간단한 영접행사를 마치고 성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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