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까마귀'로 살았네 그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37] 장성 - 기삼연 의병장 (2)
기삼연 의병장 생가마을을 찾다
기삼연 의병장이 태어난 집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일명 아치실 마을)로 장성읍에서 십리 남짓 떨어져 있는 산마을이었다.
앞장서 안내를 하는 기우천 장성향교 전교는 마을 정비 사업으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옛 집을 헐고 그 자리에는 행주기씨 재실과 관리동으로 변했다며, 세월의 무상함을 얘기했다. 옛 집터에서 바라본 산수가 예사롭지 않았다.
기삼연 의병장의 묘소는 황룡면 관동리 산21 번지에 있다는데, 왜정 시대 몰래 산소를 쓰다 보니 깊숙한 산속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 일대가 숲이 우거지고 찻길도 없기에, 하루 일정을 잡지 않으면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오후 4시에 순창에 사는 기노웅씨와 이미 약속이 된지라 발길을 떼지 못했다. 기 전교는 올 봄에 기삼연 의병장 묘소를 국립묘지로 옮길 예정인데, 문중에서 그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울 참이라고 했다.
마을 곳곳에는 '홍길동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는데, 해마다 5월이면 장성군에서 '홍길동 축제'도 연다고 했다. 나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존 인물이라고 하니, 아무리 소설이래도 다소 과장은 있을지언정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나 보다고 느꼈다.
기 전교는 행주 기씨 문중 회장이지만, 집안 부끄럽게도 한 번도 순창에 사는 기노웅씨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참에 길 안내도 할 겸 동행하겠다고 한다.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바라던 바였다. 기 전교는 장성의 지리와 역사에 매우 밝은 분으로 순창으로 가는 길 내내 도로 언저리 마을에 얽힌 이야기와 인물들을 얘기해 주셔서 지루한 줄 몰랐다.
장성이 낳은 인물들을 여러 분 소개했는데, 솔직히 옛 분들은 생소했고,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은 귀에 익었다. 장성읍 상오리(우지마을)를 지나면서는 그 마을 태생인 김상현 전 국회의원 얘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하는지 기억에 남아 있다.
전라도 장성 촌놈이 서울에 가서 구두닦이로 출발해, 6선 의원에 민추협 공동의장이 된 김상현 전 국회의원. 16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DJ의 눈 밖에 나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물구나무서기를 해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고 하더니 진짜로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에 들어가자 고향 사람 모두 감탄했다는 얘기였다.
곧 장성 땅에서 순창으로 접어들었다. 순창 땅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지대가 높다는데, 이곳 사람들은 '살아서는 장성이요, 죽어서는 순창'이 명당이라고 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이 분지에서 주둔한 곳이라며, 그 무렵 아픈 이야기들이 골짜기마다 숱하게 많다고 현대사의 단면도 얘기했다. 언제 한번 기 전교를 모시고 현대사의 비극 현장을 더듬는 자리도 마련하고 싶었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다
마침내 기노웅씨가 사는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사창마을)가 표지판에 나왔다. 기 전교는 이 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지만,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이 태어나셨다고 했다.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약속 시간을 30여 분 넘겼다. 마침 기노웅(65)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길도 멀고, 아는 것도 없고, 집도 누추하고…."
기노웅씨는 말을 몹시 아끼는 분으로 우리 일행을 거실로 안내하고서도 묻는 말 외에는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교육을 못 받아(초등학교 졸업) 아는 게 없다"면서 소장하고 있는 '성재 기삼연 선생전'이라는 책을 꺼내 놓았다.
증조 할아버지 기삼연 의병장은 나라에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지만 그동안 보훈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의병이나 독립운동하신 분이 해방 전에 돌아가신 경우는 후손이 2대까지 보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기노웅씨 아버지가 6·25 한국전쟁 때 돌아가셨기에 1962년부터 시행된 보훈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동석한 김갑제씨는 이를 보훈법의 맹점이라고 했다. 손자가 일찍 사망할 경우는 손부가 대신 받게 한다든지, 2대 후손이 일찍 사망했을 경우 3대에게까지 다소 혜택을 주는 게 독립운동가 후손을 돕는 본래의 취지에 맞을 거라면서, 보훈법의 탄력적인 운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기노웅씨 어머니는 여태 살아계신다고 했다. 요즘은 광주 아우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건강 악화로 부인이 간병하러 갔기에 차 한 잔 대접 못한다고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쏟았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일제 강점기는 폭도 수괴 후손으로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런데 곧 아버지가 6·25 전쟁 때 희생되어 어머니는 입에 풀칠을 위해 당신 3형제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셨다.
군에서 제대 후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의 땅 10여 마지기를 소작하면서 살았단다. 그동안 농사 일로 열심히 산 덕분에 이제는 내 집도, 내 땅도 조금 가지며, 2남2녀 자식도 오로지 농사로 키웠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당신은 나라에 대한 섭섭함보다 오히려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감사해 했다. 그동안 먹고사는 일에 바빠 조상 돌보는 일이나 바깥일에는 일체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고 사죄했다. 동석한 기 전교는 그동안의 힘든 삶을 충분히 이해하겠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서로 연락하며 살자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기삼연 의병장 현창사업에 힘을 합하자고 부탁하면서 우선 올 봄 기삼연 의병장 묘소 국립묘지 이장 일부터 문중 집안사람들과 함께 하자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그 새 해는 서산에 기울어 우리 일행은 돌아갈 차비를 서둘렀다. 집 앞에서 기노웅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장성으로 달렸다.
"내 눈으로 보고 지난 얘기를 듣고 보니, 왜 얼굴을 내밀지 않았는가를 알겠구먼. 홀엄씨 아래 거기다가 외가살이로 얼매나 힘들었겠는가. 홀엄씨가 집안에 남정네들이 난세에 나가 모두 비명에 죽으니, 자식들은 무지렁이로 그저 땅이나 파묵으며 쥐죽은 듯이 살아라고 귀가 아프도록 얘기했것제. 한 마디로 '지리산 까마귀'로 살았네 그려."
기 전교의 말이었다. 내가 '지리산 까마귀'란 말의 뜻을 몰라 되묻자, "먹을 것도 의지할 곳도 없는 천애고아"라고 풀이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무 맥이 없어 보이는 기노웅씨의 진솔한 모습에 목이 멘다고 탄식했다.
1908년 설날, 왜놈들에게 기삼연 의병장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색동옷을 입히지 않았고, 시신이 광주에서 장성으로 운구 될 때는 인근 고을마다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갖고 나와 길에다 펼쳐두고 곡을 했단다. 그 당시 이야기를 집안 어른에게 몰래 들은 것을 기 전교와 김갑제씨는 주고받으면서 나에게 들려주었다.
"장성호 곁에 있는 문화예술공원에는 임권택 영화감독의 동상을 세워둔 모양인데, 그 양반 대단한 인물이제.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기삼연 의병장을 두고서…."
기 전교는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보다 100년 전에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어른부터 먼저 챙기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장성공원 한 가운데다가 기삼연 의병장 동상을 우뚝 세워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나라 사랑' 본을 보인 인물로 받들게 하고 싶구먼요. 작가 선생 많이 도와주시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니오. 붓은 무서운 거요. 아,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도 선비들의 붓으로 폐위되지 않았소."
기 전교는 장성 읍내에다가 차를 세우게 한 다음 우리 일행을 굳이 밥집으로 안내했다.
"멀리 강원도에서 오셨는데, 때를 굶겨 보내드릴 수야 없지요. 전라도 장성 인심이 그렇게끔 고약하지는 않지요."
한 밥집에서 때 늦은 저녁밥을 들고는 기우천 장성향교 전교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광주로 향했다.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있는 기삼연 의병장 생가 터로 지금은 행주 기씨 재실이 들어서 있다. ⓒ 박도
기삼연 의병장이 태어난 집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일명 아치실 마을)로 장성읍에서 십리 남짓 떨어져 있는 산마을이었다.
기삼연 의병장의 묘소는 황룡면 관동리 산21 번지에 있다는데, 왜정 시대 몰래 산소를 쓰다 보니 깊숙한 산속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 일대가 숲이 우거지고 찻길도 없기에, 하루 일정을 잡지 않으면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오후 4시에 순창에 사는 기노웅씨와 이미 약속이 된지라 발길을 떼지 못했다. 기 전교는 올 봄에 기삼연 의병장 묘소를 국립묘지로 옮길 예정인데, 문중에서 그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울 참이라고 했다.
▲ 기삼연 의병장 생가 터에서 바라본 산수. ⓒ 박도
마을 곳곳에는 '홍길동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는데, 해마다 5월이면 장성군에서 '홍길동 축제'도 연다고 했다. 나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존 인물이라고 하니, 아무리 소설이래도 다소 과장은 있을지언정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나 보다고 느꼈다.
기 전교는 행주 기씨 문중 회장이지만, 집안 부끄럽게도 한 번도 순창에 사는 기노웅씨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참에 길 안내도 할 겸 동행하겠다고 한다.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바라던 바였다. 기 전교는 장성의 지리와 역사에 매우 밝은 분으로 순창으로 가는 길 내내 도로 언저리 마을에 얽힌 이야기와 인물들을 얘기해 주셔서 지루한 줄 몰랐다.
▲ 장성 향토사를 들려주는 기우천 향교 전교 ⓒ 박도
장성이 낳은 인물들을 여러 분 소개했는데, 솔직히 옛 분들은 생소했고,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은 귀에 익었다. 장성읍 상오리(우지마을)를 지나면서는 그 마을 태생인 김상현 전 국회의원 얘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하는지 기억에 남아 있다.
전라도 장성 촌놈이 서울에 가서 구두닦이로 출발해, 6선 의원에 민추협 공동의장이 된 김상현 전 국회의원. 16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DJ의 눈 밖에 나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물구나무서기를 해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고 하더니 진짜로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에 들어가자 고향 사람 모두 감탄했다는 얘기였다.
곧 장성 땅에서 순창으로 접어들었다. 순창 땅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지대가 높다는데, 이곳 사람들은 '살아서는 장성이요, 죽어서는 순창'이 명당이라고 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이 분지에서 주둔한 곳이라며, 그 무렵 아픈 이야기들이 골짜기마다 숱하게 많다고 현대사의 단면도 얘기했다. 언제 한번 기 전교를 모시고 현대사의 비극 현장을 더듬는 자리도 마련하고 싶었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다
▲ 100년 전 의병 후손들이 만나다(오른쪽 기노웅, 왼쪽 김갑제씨). ⓒ 박도
마침내 기노웅씨가 사는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사창마을)가 표지판에 나왔다. 기 전교는 이 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지만,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이 태어나셨다고 했다.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약속 시간을 30여 분 넘겼다. 마침 기노웅(65)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길도 멀고, 아는 것도 없고, 집도 누추하고…."
기노웅씨는 말을 몹시 아끼는 분으로 우리 일행을 거실로 안내하고서도 묻는 말 외에는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교육을 못 받아(초등학교 졸업) 아는 게 없다"면서 소장하고 있는 '성재 기삼연 선생전'이라는 책을 꺼내 놓았다.
증조 할아버지 기삼연 의병장은 나라에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지만 그동안 보훈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의병이나 독립운동하신 분이 해방 전에 돌아가신 경우는 후손이 2대까지 보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기노웅씨 아버지가 6·25 한국전쟁 때 돌아가셨기에 1962년부터 시행된 보훈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동석한 김갑제씨는 이를 보훈법의 맹점이라고 했다. 손자가 일찍 사망할 경우는 손부가 대신 받게 한다든지, 2대 후손이 일찍 사망했을 경우 3대에게까지 다소 혜택을 주는 게 독립운동가 후손을 돕는 본래의 취지에 맞을 거라면서, 보훈법의 탄력적인 운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기노웅씨 어머니는 여태 살아계신다고 했다. 요즘은 광주 아우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건강 악화로 부인이 간병하러 갔기에 차 한 잔 대접 못한다고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쏟았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 농사꾼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기노웅씨 ⓒ 박도
일제 강점기는 폭도 수괴 후손으로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런데 곧 아버지가 6·25 전쟁 때 희생되어 어머니는 입에 풀칠을 위해 당신 3형제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셨다.
군에서 제대 후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의 땅 10여 마지기를 소작하면서 살았단다. 그동안 농사 일로 열심히 산 덕분에 이제는 내 집도, 내 땅도 조금 가지며, 2남2녀 자식도 오로지 농사로 키웠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당신은 나라에 대한 섭섭함보다 오히려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감사해 했다. 그동안 먹고사는 일에 바빠 조상 돌보는 일이나 바깥일에는 일체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고 사죄했다. 동석한 기 전교는 그동안의 힘든 삶을 충분히 이해하겠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서로 연락하며 살자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기삼연 의병장 현창사업에 힘을 합하자고 부탁하면서 우선 올 봄 기삼연 의병장 묘소 국립묘지 이장 일부터 문중 집안사람들과 함께 하자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그 새 해는 서산에 기울어 우리 일행은 돌아갈 차비를 서둘렀다. 집 앞에서 기노웅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장성으로 달렸다.
"내 눈으로 보고 지난 얘기를 듣고 보니, 왜 얼굴을 내밀지 않았는가를 알겠구먼. 홀엄씨 아래 거기다가 외가살이로 얼매나 힘들었겠는가. 홀엄씨가 집안에 남정네들이 난세에 나가 모두 비명에 죽으니, 자식들은 무지렁이로 그저 땅이나 파묵으며 쥐죽은 듯이 살아라고 귀가 아프도록 얘기했것제. 한 마디로 '지리산 까마귀'로 살았네 그려."
▲ 집 앞에서 배웅하는 기노웅씨 ⓒ 박도
기 전교의 말이었다. 내가 '지리산 까마귀'란 말의 뜻을 몰라 되묻자, "먹을 것도 의지할 곳도 없는 천애고아"라고 풀이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무 맥이 없어 보이는 기노웅씨의 진솔한 모습에 목이 멘다고 탄식했다.
1908년 설날, 왜놈들에게 기삼연 의병장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색동옷을 입히지 않았고, 시신이 광주에서 장성으로 운구 될 때는 인근 고을마다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갖고 나와 길에다 펼쳐두고 곡을 했단다. 그 당시 이야기를 집안 어른에게 몰래 들은 것을 기 전교와 김갑제씨는 주고받으면서 나에게 들려주었다.
"장성호 곁에 있는 문화예술공원에는 임권택 영화감독의 동상을 세워둔 모양인데, 그 양반 대단한 인물이제.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기삼연 의병장을 두고서…."
기 전교는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보다 100년 전에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어른부터 먼저 챙기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장성공원 한 가운데다가 기삼연 의병장 동상을 우뚝 세워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나라 사랑' 본을 보인 인물로 받들게 하고 싶구먼요. 작가 선생 많이 도와주시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니오. 붓은 무서운 거요. 아,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도 선비들의 붓으로 폐위되지 않았소."
기 전교는 장성 읍내에다가 차를 세우게 한 다음 우리 일행을 굳이 밥집으로 안내했다.
"멀리 강원도에서 오셨는데, 때를 굶겨 보내드릴 수야 없지요. 전라도 장성 인심이 그렇게끔 고약하지는 않지요."
한 밥집에서 때 늦은 저녁밥을 들고는 기우천 장성향교 전교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광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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