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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한비야 이모한테 한라봉 줄래"

[쿠하와 함께 걷기⑤] 임신 6개월 엄마와 26개월 쿠하가 함께 오른 북한산

등록|2008.03.28 15:23 수정|2008.04.01 13:43
지난 토요일(22일) 아침, 쿠하와 저는 아주 무모한 나들이를 시도했습니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든 저와 26개월짜리 꼬마가 북한산 형제봉에 오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등산화를 미리 준비하지 않아 평소 신고 다니던 바닥이 미끄러운 단화를 신고서 말이지요.

▲ 아기용 등산화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미끄러운 검정 단화. ⓒ 정진영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고등학교 동창과 그녀의 7개월 된 딸 지유. 임신한 몸으로 산에 꼭 가겠다고 우기는 언니가 미덥지 못했는지 쉬는 날을 헌납한 쿠하 이모와 태중의 아이 까이유(쿠하는 제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이름을 동생 태명으로 선물했지요)까지.

여섯 명의 오합지졸 산행 팀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요. 고어텍스 등산화와 윈드 브레이커로 무장한 등산객들이 우리 여섯을 스쳐가면서 조심하라고 한 마디씩 거듭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다섯 시간의 산행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까닭은(겨우내 산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지만) 친구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인터넷 모임에서 한비야 언니(모임 멤버들은 모두 언니, 누나라고 부르더군요)와 함께 산에서 점심도 먹고 아끼는 책을 한 권씩 교환하는 행사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오지여행가로 널리 알려졌을 때보다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하게 된 뒤, 그러니까 책으로 치면 여행기나 중국 어학연수기 보다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은 뒤 더 만나고 싶었던 한비야 언니. 저도 보고 싶었지만, 쿠하에게 만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쿠하가 처음으로 맞은 어린이날, '유일삼촌'(양가를 통틀어 삼촌은 한 명 뿐인지라…)은 지구본을 선물했습니다. 갈라파고스의 특이한 동물이 등장하는 자연관찰 책을 보고 나면, 둥근 지구본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대각선에 닿는 남미의 갈라파고스를 찾아서 어디인지 가르쳐주곤 합니다. 몇 번 반복했더니 이제는 쿠하도 갈라파고스는 금세 찾아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세계지도나 지구본을 곁에 두고 '지도 밖으로 행군하는 바람의 딸'처럼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은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 엄마 등에 업혀온 두 아기. 한비야 언니의 인기를 실감한 날이었습니다. ⓒ 정진영


약속 장소인 북한산 형제봉 근처에 도착하자 우리보다 일찍 서둘러 온 참가자들이 스무 명 가량 모여 들뜬 표정으로 한비야 언니를 맞았습니다. 빨간 조끼에 얼굴이 반쯤 가려지는 햇빛 가리개를 쓰고 나타나 반갑게 인사하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이 시작됐습니다.

주최측이 이름표를 나눠주자 쿠하는 제 목에 걸어달라고 조릅니다. '쿠하엄마'라고 적힌 이름표를 걸고 마냥 신나하는 쿠하는 오늘 제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야 할 지 아직 눈치 채지 못합니다.

▲ 아이 시선에 맞춰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비야이모' ⓒ 정진영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전망대에서 보이던 북한산 형제봉에 오르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북한산은 구파발이나 우이동으로 가야 될 것 같고, 끝까지 올라가 백운대를 찍고 내려와야만 등산을 했다고 생각하던 제게 동네 뒷산을 오르는 듯한 형제봉 길은 좀 쉬워보인 게 사실입니다.

그리 험하지 않으면서도 산길 걷는 맛을 느낄 수 있는 형제봉 길은 한 두 시간 가볍게 오르기 좋은 코스입니다만, 아이와 함께 가는 우리 팀은 초입에서부터 일행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는 구간에서 줄곧 인솔자와 연결을 시도했지만, 오르는 길이 끝날 때까지 일행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나지막한 산길에서 한비야 언니와 이야기도 나누고, 멀리 제주도에서 온 분과 인사도 나누고 싶었는데 결국 우리 여섯만의 단독 산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스팔트 길에서 걷지 않겠다고 울며 떼를 쓰던 쿠하는 정작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고기를 잡으러' 곡에 맞춰 앞서 걷는 이모의 뒷모습에 대고 콧노래를 부릅니다.

"이모를 찾으러 숲속으로 갈까~. 이모를 찾으러 산속으로 갈까~."
"엄마, 다람쥐들이 안 보여. 다 자러 갔을까?"

▲ 불안해 하는 엄마와 아랑곳 않고 제 맘대로 가려는 딸. ⓒ 정진영


쿠하는 산에 오면 으레 다람쥐며 청설모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림책에 자주 나오는 산짐승 이름을 하나 둘 꼽으면서 노루와 곰, 여우와 호랑이를 찾습니다. 동물원에서 보던 곰과 호랑이를 산에서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다들 잠자러 동굴에 들어갔을 거라고 어설픈 핑계를 마련합니다.

두어 시간 걸으니 형제봉입니다. 우연히 만난 일행을 또다시 놓친 건 아이 걸음으로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임 사람들과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고 책 교환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를 위해 이쪽 저쪽으로 10여 분을 헤맸지만 결국 찾기를 포기하고 우리끼리 한적한 바위 아래 밥먹을 자리를 잡았습니다. 교환하려고 들고 간 책도 우리끼리 나눠갖고 말았지요. 덕분에 저는 조병준 시인의 여행기 한 권을 새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24시간 아무때나 가면 김밥 한 줄을 천 원에 먹을 수 있는 분식집이 동네마다 생겼을 때, '김밥혁명'이라고 부르며 좋아하던 김밥 몇 줄과 미리 준비해 온 포도와 과자로 요기를 하고 하산하기로 합니다. 형제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창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아이와 함께 걷기에 조금 힘들긴 해도 아주 못 넘을 고갯길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형제봉-평창동 길 코스에는 젊은이들보다는 조심스레 한 걸음씩 옮기는 친정아버지 연배의 어르신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 걷기 힘든 길은 이모가 훌쩍 넘겨주고, 완만한 경사로는 쿠하가 달리고... ⓒ 정진영


▲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걷는 녀석의 무릎은 여러번 넘어져서 흙먼지로 변색이 됐습니다. ⓒ 정진영


두 돌이 되기 전, 아이와 산에 갈 때는 등에 메고 다닐 수 있는 배낭 형태의 캐리어를 가지고 다녔는데, 걷기에 재미를 붙인 뒤로는 굳이 장비를 다 챙겨 다니지 않아도 돼 엄마는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간혹 걷기 싫다고 칭얼대는 쿠하에게 산에서 만난 센스 만점의 멋쟁이 할아버지 한 분은 출발지점에서부터 산행을 마칠 때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쿠하 기분을 맞춰주십니다. 생면부지의 어르신께선 초콜릿과 사탕, 낱개 포장된 떡이며 한라봉까지. 배낭에 챙겨온 당신이 드실 간식을 나눠 주시며 안아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같이 달래주셨지요.

처음 보는 이와 스스럼 없이 인사 나누고, 간식을 나눠 먹고, 하산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가벼운 목례나 웃음으로 인사하는 산길은 힘든 만큼 뿌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운동부족으로 찌뿌둥했던 어깨를 펴고 한 발 한 발 아이와 걷는 흙길 산책을 마칠 무렵, 우연히 한비야 언니와 행사 참가자들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 정진영

벤치에 앉아 쉬고 있던 쿠하는 아까 하산 길에 멋쟁이 할아버지가 주신 한라봉을 비야이모에게 주고 싶다며 뛰어갑니다.

"비야이모 한라봉~"
"쿠하가 한라봉을 줬으니 나도 쿠하에게 내가 좋아하는 걸 줘야지. 자, 쿠하 두 개 먹어라."

사탕 세 알을 작은 손바닥에 쥐어 주고는 어린 아이를 대동하고 따라나선 우리더러 극성 엄마들이라며 놀립니다. 그러다가 금세 웃으며 말을 바꿉니다.

"애나 엄마나 좀 힘들지만, 산에 오니까 공기도 좋고, 애들한테도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을 거야."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일행과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는 평창동 주택가를 걸었습니다.

'이응노 갤러리'에 들러 작은 그림으로만 보여줬던 군상 그림 실물을 쿠하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응노 갤러리는 대전으로 새 집을 지어 옮기고, 현재 그 자리는 다른 상업 갤러리가 대신하고 있어 아쉬웠습니다. 잠든 아이를 안고 자하문 터널을 지나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으로 향합니다.

자하문 터널과 경복고등학교 사이에 위치한 맛있는 '중국'집에 들렀으나, '오늘 준비한 재료가 떨어져 죄송합니다'라는 문구만 읽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택시비가 아까워 본전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재료가 없다는 데 어쩔 수 없이 다시 택시를 타야했지요. 고추기름으로 볶는 매콤한 자장면과 양이 적어도 용서가 되는 달콤한 탕수육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오후였습니다.

산과 그림으로 하루 해가 짧았던 주말 오후. 후드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치면 움 틔울 채비 마친 꽃나무들이 한꺼번에 만개하겠거니 아쉬워하며 돌아왔습니다. 캐리어는 물론 등산화조차 없이 시작한 산행은 잠이 없는 아기 쿠하의 길거리 수면을 도울 만큼 고된 길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기회 닿는 대로 아이와 함께 나뭇잎 밟으며 걷는 산길에서 더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저는 한비야 언니의 말대로 극성 엄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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