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38] 장성 - 기삼연 의병장 (3)

등록|2008.03.29 12:35 수정|2008.03.29 12:35
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경술국치 전후로 전라도에서는 다음의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겼던 의병장들이며, 기삼연 의병장은 한말 호남의병의 대표 인물이었다. 김죽봉은 김준(金準, 金泰元)을 이르고, 안담살이는 안규홍(安圭洪),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포대 박도경(朴道京)을 말하는 듯하다.

▲ 성재 기삼연 의병장 영정 ⓒ 기삼연의병장 기념사업회

기삼연 의병장은 1851년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4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성재(省齋)이며, 자는 경로(景魯)다. 전통적인 유가 가문으로서 일찍이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빼어나 노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히 병서(兵書)를 겸해 공부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필법(筆法)이 독특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는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놀랍게 능숙하여,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익혔을까?"하고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장성에서 나주로 행군하였다가 다시 광주로 가서 회합할 때, 성재 기삼연이 300명의 장성의병을 거느리고 의진(義陣)에 도착하니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거사하려 할 즈음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사령관 이겸제(李謙濟)와 관병 5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선유(宣諭 임금의 명령을 전함)하게 되어 기우만이 의병 해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에 기삼연이 개탄하였다.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이는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세우다

▲ <성재기삼연 선생전> ⓒ 박도

그는 독자적으로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02년 2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탄로되어 결국 전주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그 날은 딸의 초례 날이었다. 하객들이 모두 동요하였으나 본인은 오히려 태연히 체포당하였다.

전주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평리원(平理院)에 이감되었다. 머리를 깎이기 직전 평리원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4개월만에 탈옥하였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영광 수록산 석수암(石水庵)에서 다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후 의병부대를 편성,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여 재기를 꾀하였다.

이때 편성된 의진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기삼연(奇參衍)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선봉(先鋒) 김 준(金準 泰元)
참모(參謀) 김엽중(金燁中)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김수봉(金樹鳳) 김봉규(金奉奎)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서석구(徐錫球)
군량(軍糧) 김태수(金泰洙) 전수용(全垂鏞, 전해산의 이명)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이석용(李錫庸)
감기(監器) 이영화(李永和) 김치곤(金致坤)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박영건(朴永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정원숙(鄭元淑)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 성철수(成喆修) 박도경(朴道京)

이상 17인의 이름으로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백성들의 협력을 촉구하며,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이같이 봉기한 기삼연은 그 후 무장(茂長) 법성포(法聖浦) 고창(高敞)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전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기삼연 의병장 후손들(왼쪽부터 기우천 장성 향교, 증손 기노웅, 기문백 행주 기씨 문중 총무) ⓒ 박도


끝내 못다 이룬 꿈

1907년 9월 23일, 고창 문수사(文殊寺)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교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때 모양(牟陽)의 백성들이 기삼연 의병부대에게 적극 협력하여 기밀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무기와 군량을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특히 김준의 공이 컸으며, 아군의 군사 3, 4명이 전사하였다.

1907년 12월 7일, 기삼연 의병부대는 마침 법성포(法聖浦)에 많은 세곡(稅穀)이 쌓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백여 명이 먼저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소각시킨 후 창고 곡식을 빼앗아 군량미로 쓰고, 남은 곡식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08년 1월 말(양력), 장성 무동촌(舞童村)에 이르러 적을 만나 격전을 벌여서 적 5, 6명을 살상했으나, 아군도 흩어졌다. 이때 전투 양상은 소단위 유격전이었다. 특히 김준의 유격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점차 추워지자 도망병이 생긴 것이다.

다시 흩어진 군사들에게 연락하여 동짓날에 영광을 공격하려는데 기밀이 누설되고, 추위로 병든 군사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서우산(犀牛山) 속에서 군사를 휴식시킨 후 나주의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기삼연은 의진을 이끌고 담양 금성(金城)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험준한 지형이라 설을 쇨 계획이었다.

▲ 장성공원에 세워진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 ⓒ 박도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피아간 4, 50명의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결국 완전 포위당하였다. 기삼연은 최후를 각오하고 의관을 정비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내려 깔려 요행히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출한 기삼연은 순창 복흥산(福興山)으로 들어갔다. 부상으로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낀 기삼연은 장졸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해산명령을 내렸다.

기삼연은 구수동(九水洞)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쇠면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설상을 받았다. 그때 적 수십 명이 들어와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기삼연은 창을 열고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을 해치지 말라"고 하면서 순순히 체포, 담양으로 압송되었다. 담양 군수가 거만한 언사로 농을 하자 크게 꾸짖었다.

"너는 선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왜놈의 종노릇을 이렇게 심하게 하느냐."

담양에서 다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교차를 메고 가는 이들이 눈물을 흘려 길이 지체되었다. 광주 감옥에 수감된 기삼연은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애초, 그의 꿈은 해를 삼키려고 한, 곧 일제를 패망시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때 마침 김준은 창평(昌平)에서 일군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을 추격하다가 기삼연 의병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정병 30명을 이끌고 탈환하고자 추격하였으나, 이미 경무서에 수감된 뒤였다. 일군들은 요시다 이하 다수의 일병이 사상한 것에 대한 복수로 기삼연을 무수히 난자하였으며, 결국 이튿날인 1908년 1월 2일(음력) 광주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적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시신이 너무 참혹하여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뒤에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어 염하여 서탑등(西塔嶝)에 임시 매장한 뒤 목비(木碑)를 세우고 '호남 의병장 기삼연'이라고 썼다.

기삼연 의병장 사후에는 그의 산하에 있었던 부장들이 독립된 의진을 형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호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김준(김태원) 전수용(전해산) 이석용 심남일(沈南一) 김봉규 박도경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지휘 하에서 전략을 수행하다가 검거되어 형을 받은 인물들로 박도경(朴道京, 道慶) 김공삼(金公三, 奉奎) 이중백(李仲栢)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으며, 그밖에 오성현(吳成玄) 박재두(朴在斗) 등은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홍영기 편저 <義重泰山>, 장성향토사연구회의 <장성의 맥>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