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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해방에 대한 쌉쌀한 코미디

척 팔라닉의 섬뜩한 블랙코미디 <인비저블 몬스터>

등록|2008.03.30 11:35 수정|2008.03.30 11:35

▲ 척 팔라닉의 <인비저블 몬스터>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신랄하게 비판한 블랙 코미디이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 ⓒ 책세상

척 팔라닉은 데이빗 핀처 감독,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가 주연을 맡은 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의 원작소설로 더욱 유명하다.

척 팔라닉의 처녀작은 <인비저블 몬스터>였지만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은 책은 <파이트 클럽>이다. <인비저블 몬스터> 내용이 너무나 끔찍하여 영화 <파이트 클럽>이 성공하기 전까지 어떤 출판사도 받아주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척 팔라닉을 단지 피범벅 이야기로 푼돈 버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너무 이른 판단이다. 척 팔라닉은 첨예한 문제의식과 재미를 겸비한 스타작가다.

<인비저블 몬스터>는 사고로 인해 얼굴의 반쪽을 잃은 패션모델 여자의 이야기다. 어떤 아름다운 패션모델이 자동차를 몰다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서 턱이 날아가 버리고 만다.

한때 무척 아름다웠던 그녀는 영락없는 괴물이 되었고 세상에서 그녀의 존재는 점점 사라진다. 추악해진 그녀를 주목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척 팔라닉이 과거 열차 엔진 수리공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너무 유명해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하지만 척 팔라닉의 작품 세계는 그가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적 삶을 살았던 것과 무관하진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문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본주의와 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척 팔라닉은 <인비저블 몬스터>를 셀프 세탁소에서 <보그> 따위의 부르주아 잡지를 뒤적이다 구상했다 한다. <인비저블 몬스터>에서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물신주의에 대한 혐오와 조롱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당혹스러울 정도다.

팔라닉 스타일인지 모를 문장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번쩍 연속해서 터지듯, 단편적인 문장들의 나열이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고 이미지를 형성한다. 무척 산만한 문장이지만 플래시 불빛이 망막에 남듯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 묘한 정서가 어두침침하고 찐득찐득하다. 마치 식은땀 나는 악몽 속을 헤매는 듯하다. 이야길 따라가며 끝으로 치달을수록 충격적인 반전이 이어져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척 팔라닉과 <인비저블 몬스터>는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볼거리가 있다. 감히 밥 먹으면서 책 못 볼 정도다. 아마도 이 때문에 19세 딱지를 받았겠지만 이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역시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에 대한 싸늘한 비웃음이다. 척 팔라닉은 자본의 폭력성과 중독성에 주목하고 있다.

"아름다워질 수 없다면 차라리 보이지 않는 걸 택하겠어."
"넌 그저 제품에 지나지 않아. 차를 디자인하는 사람들, 그들도 제품들이야. 네 부모님도 제품이야. 네 선생들도, 네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도."
"날 해방시켜줘. 관대함으로 보이기만 하는 것에서. 사랑으로 보이기만 하는 것에서."

척 팔라닉은 자본과 패션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을 썼다. 그것은 실리콘 가슴으로, 지방수술로, 진통제로, 에스트로겐 약물로, 발륨으로, 인공 질의 형태로, 때로는 매스미디어와 외모지상주의로 변신해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기존 사회의 의식을 신속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 과정은 무척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다. 사람마저 그냥 상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과 매스미디어가 생산한 이미지를 사랑하고 소비한다. 자본주의의 천박한 억압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해방을 꿈꾸었다.

<인비저블 몬스터>는 결국 인간해방에 대한 쌉쌀한 코미디로 읽힌다. 척 팔라닉은 친절하다. 처음에는 온통 물음표 투성이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의문을 다 풀어준다. 메가톤급 충격을 안겨주는 마지막 결말을 읽으면 아마도 독자는 브랜디 알렉산더와 똑같은 말을 웅얼거릴 것이다.

"그건, 그건 미처 몰랐는데."
덧붙이는 글 인비저블 몬스터,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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