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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아버지,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어린왕자>로 사랑의 메신저가 되다

등록|2008.03.30 14:24 수정|2008.03.30 14:24
요즘 <어린왕자>에 푹 빠져 있습니다. 프랑스 조종사 작가로 유명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처음 접한 것은 그때가 초등학교 시절인지 중고등학교 시절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정도로 꽤 오래 전 일입니다.

하지만 정작 <어린왕자>를 눈을 반짝이며 가슴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어른이 다 되어서의 일입니다. 이태전인가는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눈길에 닿아 책을 단숨에 읽어버린 기억도 납니다.

요즘은 이른 아침마다 <어린왕자>를 만납니다. EBS 영어 프로그램인 'Read & Speak'에서 영문으로 된 <어린왕자>를 재방송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생애 통산 열 번도 넘게 읽은 책인데도 아직도 제가 발견하지 못한 샘이 책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독자로서의 무능 탓이라고 해도 좋은 것은 뒤늦게 새로이 발견한 샘에서 목을 축이는 기쁨이 큰 까닭이지요. 다음은 영어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소개해준 <어린왕자>의 한 대목입니다.  

‘What makes the desert beautiful is that somewhere it hides a well.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칠판이 가득 채워질 만큼 큰 글씨로 영어문장과 우리말 해석을 함께 써놓은 뒤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지만 표정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물이 아니라 오아시스 아닙니까?”

저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맞아. 오아시스가 좁은 의미로는 샘이야. 우물이고도 하고. 그럼 이렇게 해보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생각해 이 말?”

뭔가 감이 잡히기는 해도 표현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런 감조차 없는 것인지 사뭇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주는 것은 교사인 제 몫이었지요.  

“우리 경희가 어떤 남자를 사귀고 있는 거야. 지금 말고 조금 더 커서. 그런데 그 남자가 겉보기에 좀 형편이 없는 거야. 사막처럼 황폐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누가 봐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그런 남자인데 우리 경희는 그 사람과 꼭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경희는 그 남자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던 거지. 마치 사막에 감추어진 우물처럼 말이지. 우물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잖아. 그 우물은 사랑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어. 겉보기는 멀쩡한데 그 안에 생명의 우물이 없는 그런 사람은 곤란하잖아.”

말을 마치자 아이들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몇 해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그 후유증과 생활고로 인해 술을 자주 마시게 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아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의 욕심이 많은 가봐. 난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해주고 싶고 또 사랑도 받고 싶은데 그게 여러분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거든. 아버지가 직업도 변변치 않고 술도 많이 드시고 해서 원망을 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선생님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깊은 것 같단 말이지.”

“그거야 당연하죠."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뜻밖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일말의 섭섭함이 느껴질 만큼 아이의 표정은 차갑고 단호했습니다. 물론 그런 섭섭함이 안도의 마음으로 뒤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날 이렇게 갈무리를 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현실 때문에 비록 사막처럼 메마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누구보다도 내 아버지가 아름다운 것도 그 어딘가에 나에 대한 사랑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내 아버지를 그 사람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고말고요.”

아무리 사랑의 욕심이 크다 해도, 이런 경우 저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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