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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값 폭등? 여기선 라면도 자장면도 2000원

[미니벨로 타고 서울골목여행26] 노량진동, 철도 시발지이자 최초 유료 도로 놓은 곳

등록|2008.04.21 12:48 수정|2008.04.22 01:14

▲ 노량진역 학원 간판. 동네가 학원가라는 것을 간판이 잘 보여준다. ⓒ 조정래


서울 최대 수산시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동작구 노량진동.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고 불렸던 이 곳은 조선시대 한강가에서도 특히 경치가 좋아 문인 명사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나루터기도 했지만, 군대가 주둔해 진(鎭)을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강가에 숲이 우거져 있고 물결이 잔잔했다고 알려진 이 곳은 지금은 서울에서 번잡한 곳 중 하나가 됐다.

노량진은 길에 있어선 '최초' '최대'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은 동네기도 하다. 1899년 개설된 한국 최초 철도 경인선은 노량진에서 출발해 제물포까지 33.2km를 달렸다. 당시 그 구간을 달린 기차는 증기기관차였다. 기차 운행 이후 '기차놀이'라는 놀이가 전국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그 자리엔 지금 철도 시발지 비석이 서 있다. 서정주가 적은 시와 김종필이 국무총리이던 시절 쓴 휘호가 적혀 있다. 한 때 권력을 휘둘렀던 이의 흔적은 이렇게 곳곳에 보이지 않게 남아 있다.

용산구 이촌동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한강철교(1900년 준공)는 한강에 놓인 최초 다리다. 이후 서울역(당시 경성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제물포까지 달리면서 노량진은 철도 시발지라는 지위를 서울역에 넘겨줬다. 1917년 한강 인도교가 놓이면서 사실상 나루터로서 기능은 잃어버렸다.

▲ 철도시발지 비석.(동작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 동작구청


1967년 9월 23일 개통한 노량진-영등포 간 4차선 도로는 국내 최초 유료도로다. '강변1로(3.72km)'라고 불린 이 길이 만들어지면서 1968년 한강개발사업이 본격 시작될 수 있었다.

여의도 개발도 강변1로 개통과 함께 시작됐다. 이후 강변9로까지 이어지면서 180km 강변도로(현 올림픽대로)가 만들어졌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분30초. 이전까지 전차가 이 길을 9분40초에 달린 데 비하면 절반 이상 시간이 줄어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1910년 10월엔 노량진 상수도 수원지가 만들어졌다. 역시 서울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상수도 수원지다. 그 외에도 1990년까지 국내 최장 다리였던 노량대교(2.07km), 1927년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연 근대식 수산시장인 노량진시장 등 노량진은 여러모로 근대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2009년 10월 인천대교가 완공되면 12.3km로 국내서 가장 긴 다리가 된다.)

지금은 대한민국 대표 학원가로 각종 입시 정보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전달한다. 신선한 생선 회를 먹기 위해 종종 찾았던 노량진동 뒷골목을 사진 찍는 조정래, 친구 김희재와 함께 찾았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입시학원 많은 동네, 음식값은 너무 싸

▲ 학원 건물 벽에 각종 입시, 자격증, 취업 정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 김대홍



노량진동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라도 노량진역에 내리면 동네 성격을 쉽게 알 수 있다. 역 구내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학원 간판. 차창 밖으로 일렬로 보이는 간판에서 시작해 계단을 오르며 보이는 간판, 육교 위에서 보이는 간판이 모두 학원이다.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이 4조니 10조니 하는 말을 노량진동에서 느낄 수 있다. 원래 서울 지역 입시학원 1번가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강북이었지만, 1980년대 강북 지역 입시학원이 대거 노량진으로 옮겨오면서 노량진이 입시 학원가의 메카로 떠오른다. 지금은 입시뿐만 아니라 고시, 자격증, 공무원, 경찰 등 분야별로 학원이 다양하다. 90년대 들어선 대치동과 목동이 떠오르면서 잠시 쇠퇴기를 맞기도 했으나 요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 고시생일까. ⓒ 김대홍


어느 건물 벽에 전국 공무원 입시 경쟁률이 붙어 있다. 선발 예정인원 3357명에 응시인원이 16만4690명으로 평균 49.1대1이다. 이중 행정(전국:장애인), 시설(일반토목:일반), 교육행정(일반)은 경쟁률이 200대1이 넘으며, 시설(건축:일반)은 무려 356.8대1이다. 갑갑한 숫자다. 저 경쟁률을 과연 운 없이 뚫을 수 있을까 싶다.

몇 년 전 시험을 준비하던 주위 사람 중 절반은 끝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고, 절반은 시험에 합격했다.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경쟁이 치열해진 듯싶다. 살아남기 위한 이 치열한 경쟁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행복한 삶일까. 몇 년 전 시험에 실패했던 사람 중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시험에 통과했지만 불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시험 합격이 곧 행복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네 길 이름은 학원길, 등용길이다. 벽엔 각종 포스터를 붙인 청테이프 흔적이 가득하다. 수없이 떼고 붙인 발자취들이다. '아름다운합격교회'라는 이름엔 노량진동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얼마나 합격을 하고 싶었으면 교회 이름이 '아름다운합격'일까.

입시학원가 쪽엔 20대로 보이는 이들이 넘친다. 거리가 활기차다. 공부에 찌든 표정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박휘순이 공부에 찌든 캐릭터 '노량진 박'을 연기했지만, 그런 사람을 길에선 보지 못했다.

일행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놀랄 만큼 싼 밥값이었다. 자장면 2000원, 잔치국수 1000원, 라면 1500원은 어디서도 못 본 가격이었다. 어느 곳에선 밥 한 공기 더해서 라면값을 2000원 받았고, 밥값이 1500-2000원인 곳도 있었다. 올해 밀가루값 폭등, 음식값 폭등으로 난리지만 노량진동만은 그 야단법석에서 벗어나 있다.

한 군데를 찾아 들어갔다. 점심을 먹지 않은 세 명은 각자 하나씩 시켰다. 배가 빵빵해지도록 먹었는데도 채 1만원이 되지 않는다. 비가 오니 일행은 술 생각이 났다. "술을 마셔도 되냐"고 주인에게 물어보니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실망이다. 희재는 입맛만 다셨다.

변강쇠와 옹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장승배기

▲ 노량진동 곳곳에 오래된 집이 남아 있다. ⓒ 조정래


노량진동은 뉴타운지구 가운데 하나다. 길 곳곳엔 '뉴타운재개발 위원회' 간판이 걸려 있다. 그 말은 동네엔 낡고 오래된 집이 많다는 뜻이다. 돈 없고 가난한 학생들이나 수험생들에겐 기댈 곳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량진1동 한 아파트 건설지 옆에서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을 만났다. 우산을 쓴 두 사람이 지나가려면 한 사람이 우산을 높이 들어야 한다. 어느 집은 지붕에 천을 덮고 기와를 얹어놓았다.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처마는 낮고 담도 낮다. 바닥은 보도블록을 깔아 깔끔한 편이다.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면 장승배기역이 나온다. 조선시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 쉬었던 자리다. 당시엔 숲이 가득했다고 한다. 임금은 숲의 기운을 누르고 쉴 자리도 마련한다는 뜻에서 장승을 세우도록 명했다. 이것이 이 땅이 장승배기가 된 이유다.

▲ 대방장승이 있었던 곳 옆에 장승을 세우고 매년 10월 장승제를 지낸다.(동작구 문화관광 홈페이지) ⓒ 동작구청


고전소설 <변강쇠전>엔 장승배기와 관련한 다소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변강쇠와 옹녀가 어울려 살았는데, 옹녀가 나무를 때라 시키면 게으른 변강쇠는 길가 장승을 뽑아서 때곤 했다. 그렇게 장승을 하나둘씩 뽑기 시작하니 전국 장승들이 잔뜩 노했다.

당시 조선 팔도 장승의 우두머리는 대방 장승으로 바로 장승백이역 근처에 있던 장승이었다. 팔도 장승들은 각자 병 하나씩 갖고 와서 변강쇠의 발톱에서 정수리까지 바르기로 결정했다. 결국 온 몸이 병으로 뒤덮인 변강쇠는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다.

1991년 10월 옛 장승이 있었던 자리에 높이 4m짜리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만들고 매년 10월 24일 장승제를 열고 있다. 당시 일부 개신교 목사와 신도들은 우상숭배라며 심하게 반대해 몇 차례 장승이 피해를 입었다. 1991년 10월 24일 장승 한 쌍 중 지하여장군이 불에 탔고, 1994년 1월 23일엔 지하여장군 장승 밑둥이 잘렸다.

장승배기역 옆 언덕에도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있다. 어느 골목 한쪽은 돌담, 한쪽은 함석판이다. 이 곳 지붕은 대부분 기와다. 천과 비닐을 덮은 지붕이 많이 보인다. 타이어나 큰 고무대야로 덮은 곳도 있다. 모두 임시처방이다. 그렇게 임시처방을 하면서 여러 해를 버텨왔을 것이다.

▲ 장승배기역 옆 언덕에서 내려다본 동네. 아래 장승배기역이 보인다. ⓒ 조정래



이 동네엔 보도블록도 깔려있지 않고 고스란히 시멘트길이다. 벽도 시멘트, 바닥도 시멘트다. 노량진 본동에도 오래된 집들이 모인 동네가 있다. 오래된 집들은 노량진 곳곳에 나눠져 있다. 노량진이 그 동안 꾸준히 재개발됐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개발이라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꼭 눈물 흘리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노량진본동을 본격 철거할 당시 월세를 낼 돈이 없어 목숨을 끊은 이들이 있었다. 불과 십 몇 년 전이다.

"9일 상오9시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산10 조종례씨(68) 집에서 조씨의 딸 김효순씨(30)가 살고 있는 3평짜리 가건물이 강제철거된 것을 비관, 부엌 천장에 나일론끈으로 목을 매 숨졌다. 남편 강우식씨(38·노동)는 '일주일전 이웃에 있는 사글세방으로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뒤 처가 근처에다 무허가 집을 짓고 생활해왔으나 지난 8일 관할 동작구청에서 이마저 철거하자 아내가 몹시 비관해 왔다'고 말했다."-<서울신문>(1990년 12월 10일)

서민들의 애환을 다룬 <연탄길>은 저자인 이철환이 노량진에서 강사 생활을 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옮긴 책이다. 그가 만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동네에 고스란히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90여년 된 노량진시장, 점포 수만 850여 곳

▲ 노량진시장. ⓒ 조정래


노량진역에서 육교를 하나 건너면 노량진시장이다. 노량진시장은 1927년 서울역 옆 의주로에 경성수산 주식회사로 시작했다. 지금 자리로 옮긴 것은 1971년이다. 당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차관을 들여 2만2870평 규모의 큰 시장을 만들었다.

지금 노량진시장에 있는 점포수는 845곳. 완도, 당진, 영광, 삼천포 등 전국 팔도 해산물이 나는 곳은 모두 다 모여 있다. 건어물상과 횟집, 매점, 경매업에 일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더하면 전체 직원은 4천여 명이다.

농산물이 많이 나는 풍요로운 땅이라서 일제시대 수탈이 심했던 전라도 땅처럼 서울 수산물의 절반 정도를 거래한 노량진시장에도 눈독을 들인 이들이 있었다. 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은 자신의 측근에 운영권을 넘겨 이익을 가지려고 했다. 결국 정권교체 후 전기환은 강제 강탈 건으로 징역을 살았다.

▲ 노량진시장. ⓒ 조정래


반대 길을 걸었던 이도 있다. 이 곳에서 젓갈을 파는 한 할머니는 1983년부터 고아원과 낙도 어린이와 양로원 등에 책을 기증했고, 1999년에는 30억 정도 재산을 고향 서산에 있는 한서대학교에 기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똑같이 돈을 만지더라도 누구는 정승처럼 쓰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컸던 노량진수산시장은 이제 부산지역에 최고 자리를 넘겨주었다. 올해 4월 개장 예정인 부산 감천항 공영 수산물 도매시장은 연간 60만톤 수산물을 처리한다. 노량진수산시장이 연간 9만8000여톤 정도니 6배가 넘는다. 

노량진시장은 항상 흥청거린다. 비가 온 이 날도 시장은 사람으로 넘쳤다. 시장 상인들은 꽤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편이다.

정래와 함께 걸어가니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모시 모시"라고 외친다. "예?"라며 뒤돌아봤더니, "일본 관광객인줄 알았다"면서 말을 한다. 사진기를 든 모습을 보고 "방송국에서 오셨나"라고 말을 붙인다. 은근슬쩍 말을 붙이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노량진시장은 서울에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다. 2000년 서울시가 외국 관광객 700명 대상으로 '서울 명소 30선'을 물었을 때 10위 안에 들어간 적이 있다.

시장을 걸어다니다 위를 보니 수산물 시세가 실시간으로 나온다.  Kg 평균가가 대구(국내자연산)는 7974원, 대구(수입자연산)는 3074원, 넙치(국내자연산)는 5119원, 물메기(국내자연산)는 800원, 갈치(수입자연산)는 7640원이다.

시장이 모두 똑같은 물건을 파는 곳 같아도 자세히 보면 네 가지 종류로 나눠져 있다. 시장 가장 앞쪽은 활어를 파는 가게로, 간판엔 '고급'이라고 붙어 있다. 반찬에 쓸 물고기를 파는 곳 간판은 '대중'이다. 그 외 '냉동'과 '패류' 가게가 있다.

노량진동은 서울 교통의 중심지로 활기가 넘치는 동네다. 2009년 지하철 9호선(노량진, 본동)이 개통하고 경전철이 2017년 완공되면 동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날 것이다.

장승이 뽑힌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섞이고 문화와 문화가 섞이면 상처를 받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근대 교통의 중심지였던 노량진동이 빨리 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 천천히 가더라도 다독이며 가는 게 좋다는 모범을 보이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노량진동 전경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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