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가헌책방 <책사랑방> 아저씨가 일하는 책상 둘레. 문가. ⓒ 최종규
(1) 삶과 책
헌책방 <책사랑방> 아저씨는 말합니다. "하도 책장사가 힘드니까 이렇게 나서는 판"이라고(아저씨는 몇 달 동안 입시학원 강사 노릇을 함께했습니다. 책방 살림만 꾸리고 싶었으나, 당신 뜻처럼 살아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면서).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 우리 세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버스기사나 전철기사로 일하면서 우리 세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논밭을 일구면서, 도시에서 공장 일꾼으로 땀흘리면서도 세상을 느낍니다. 예배당이나 절집에 나아가 비손을 드리는 가운데에도 우리 세상을 느낍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에도,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걸레를 빨아 방을 훔치는 가운데에도 세상을 느낍니다. 찬물로 멱을 감고 머리를 감는 가운데에도 세상을 느낍니다.
▲ 우리가 바라는 책은우리가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바라는 책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두루 읽는 책? 내 마음에 와닿을 책? ⓒ 최종규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모두 참으로 바쁩니다.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책읽을 겨를을 내기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말 고단하고 빠듯해서 책을 못 읽을까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읽을까요? 시간이 없으면 하루에 한 줄을 읽으면 됩니다. 우리 동네 구멍가게 할매나 할배는 하루에 다문 한두 줄이라도 성경을 읽으며 한두 해에 한 차례씩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냅니다. 책 살 돈이 없으면 빌려서 읽으면 됩니다. 또는, 책방에 서서 읽으면 됩니다. 아니면 헌책방 나들이를 해서, 누군가 내놓아서 싸게 사들일 수 있는 책을 만나면 됩니다.
우리한테 책읽을 겨를이 없거나 책살 돈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한테 주어진 삶을 알뜰하고 알차고 아름답게 살아갈 겨를이나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가꾸거나 북돋울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2) 책에 바치는 땀과 피
'책사랑방' 아저씨가 일하는 책상 옆에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홀가분한 몸차림으로 골마루를 누빕니다. 이 책 저 책 살피고 끄집어내다가는 다시 꽂아 놓습니다.
<현대예술의 운명>(웨이드레이경식 옮김, 정음사,1979)이라는 책을 봅니다. 살며시 한 장 두 장 넘깁니다. 차례를 봅니다. 마음에 드는 꼭지가 어디에 있을까 헤아립니다. 휙 뒤로 넘깁니다.
.. 죽은 자는 구제할 수가 없다. 예술은 의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가 아니다. 예술은 부활의 희망에 타고 있는, 죽음 직전에 놓여 있는 인간인 것이다 .. (254쪽)
▲ 음반<책사랑방>에는 음반을 많이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방도 꾸리고 있습니다. ⓒ 최종규
서른 해 가까이 묵은 책 하나에서 한 줄 마음을 콕 찌르는 대목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책 하나 값으로 이천 원이나 삼천 원을 기꺼이 치를 수 있습니다. 말씀 하나 만난 고마움으로 사천원도 치를 수 있고 오천원도 치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후비는 말씀이 없다면 돈 백원도 아깝지만. 아니, 거저 주어도 가져가고 싶지 않지만.
.. 예술가는 자기의 넋을 자기의 작품 속에 불어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은 결코 탄생하지 않는다. 창조의 신비는 행해지지 않는다 .. (214쪽)
제 마음에 깊이깊이 와닿는 책을 생각합니다. 이런 책을 지어낸 사람은 한결같이 자기 모두를, 자기가 얻은 모두를, 자기가 가진 모두를 책에 불어넣었습니다. 글쓴이도, 그림쟁이도, 사진쟁이도, 출판사 엮은이와 펴낸이도 모두 자기 얼과 넋과 땀과 피를 책 하나에 쏟습니다.
이런 책들은, 처음 나온 때에 제 대접을 못 받고 빛 한 줄기 못 쐬었다고 해도, 어느 날 누군가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비록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 겨우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서 뒹굴고 있다고는 해도, 그 뒷날, 출판사까지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 그 뒷날, 새록새록 새숨을 얻고 새싹을 틔웁니다.
<비누방울 마음>(표동자 편역, 성바오로출판사,1982)이라는 조그마한 어린이책을 골라듭니다. <서울대학교 졸업증서>(1974)와 <서울대학교 학위증서?(1974)가 함께 붙은 상장을 봅니다. 사회학과에서 '준최우등'을 받은 유아무개 님 것입니다. '이화여자고등학교' 1969년 졸업사진책을 보다가 <제4회 전국어린이우표전시회>(서울 체신청장) 기념우표첩을 봅니다. 어느 한 집에서 나온 듯합니다. 멀리멀리 집을 옮겼을까요. 머나먼 나라로 떠났을까요. 어쩌면, 이 졸업사진책 임자였던 분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신지도 모릅니다.
▲ 책꽂이 한켠인터넷 살림도 꾸리고 있기에, 책은 갈래에 따라 잘 나뉘어져 있습니다. ⓒ 최종규
(3) 책 사랑
졸업사진책과 함께 쌓여 있는 낡은 사진책에 꽂힌 철지난 사진을 봅니다. 사진을 찍은 연대를 헤아리면, 사진 임자는 제법 돈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이이는 돈있는 삶을 꾸리고 있을는지. 이제는 돈없는 삶을 꾸리고 있을는지. 지금도 자기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을는지. 이제는 사진이고 돈이고 뭐고 미련이 없어서 훌훌 털어내고 싶어할는지.
<사랑의 지도>(고 마태오, 가톨릭출판사,1978)라는 두툼한 책이 보입니다. '고 마태오'라는 이름이 퍽 낯익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분이 1980년대에 북녘 나들이를 하고 나서 쓴 책이 하나 있습니다. <아,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였던가.
.. 이러한 소란 속에서도 나는 땅을 사랑하는 것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공산주의도 싫었고 민주주의라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하나의 이념을 택하면 필연코 그에 반대되는 이념을 배제하고 죽여야 하는 정치라는 것에 나는 커다란 혐오를 갖고 있었다. 하나의 생활관을 선택해도 그것이 남을 미워하게 하거나 또는 제거하려 하지 않고 남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그러한 생활을 나는 하고 싶었다. 바로 그것이 땅이었고, 농사일이라고 생각했다. 땅과 농사일은 나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미워하게 하지 않았다 .. (77쪽)
▲ 골마루 한켠우리 마음을 먼저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으면, 우리 마음을 살찌우는 좋은 책을 어디에서든 넉넉히 만날 수 있습니다. ⓒ 최종규
공산주의가 나쁘거나 민주주의가 좋다거나 사회주의가 훌륭하다거나 자본주의가 엉터리라거나 할 수 없습니다. 어느 틀거리이든, 틀거리를 다루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고 어떤 생각이고 어떤 매무새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양파를 썰고 무를 써는 칼로 사람을 찌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참을 밝히고 거짓을 드러내는 붓이 아니라, 돈과 이름과 힘을 얻으면서 이웃을 괴롭히려고 붓을 드는 사람이 있거든요. 넉넉히 벌어들인 돈으로 이웃사랑을 나누기보다는 제 배만 더 불리려고 돈굴리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더 많은 짐을 실어나를 수 있는 자동차이지만, 골목길에서도 씽씽 몰면서 사람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 위에 법이 있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사람 위에 법이 놓인 세상이에요. 사람 위에 학벌이 있을 수 없고, 사람 위에 책이 있을 수 없고, 사람 위에 종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만, 자꾸자꾸 우리들 사람 위에 무엇인가가 올라서고 있어요.
책 또한 어느 책이 더 훌륭하다거나 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아니, 어느 책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지요. 어느 책이 덜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 책 하나를 놓고 이래저래 따지는 잣대는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 눈매와 눈길로 돌아보건대, 글쓴이나 엮은이나 펴낸이 땀방울과 핏방울이 얼마나 스며 있느냐를 느끼는 잣대. 새벽바람으로 일을 나가고 밤바람으로 집으로 돌아와 고단함에 쩔고 쩔어 자리에 벌렁 나자빠지는 사람까지도 책장을 넘기면서 졸린 눈을 비빌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잣대.
대충 좋게 써내는 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어느 만큼 괜찮다고 느낄 만한 눈높이로 엮어내는 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책 하나를 만드는 동안에는, 여태까지 이루어낸 책을 모두 뛰어넘을 만큼 가장 단단한 책, 더없이 야무진 책으로 꾸며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해서 한 권을 일구어 낸 뒤, 다음에 또다른 책을 일굴 때에는 다음 책이 여태까지 나온 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이 되도록 다시금 피를 쏟고 땀을 쏟아야지요. 제가 사랑하는 책은 이런 책들입니다. 그 책이 나온 그때로써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고 거룩한 책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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