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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물량공세' 표현은 '반미'고 일제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제도 확립?

뉴라이트 교과서 집필자가 만든 대한상의 '교과서 개선안'

등록|2008.04.03 22:59 수정|2008.04.04 08:40

▲ 대한상의가 교과부에 건넨 요구안 원문. ⓒ 윤근혁

  교과부(교육과학기술부)가 대한상공회의소(회장 손경식, 대한상의)의 '교과서 개선안'을 바탕으로 초중고 경제·사회·국사·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절차에 일부 착수한 것으로 지난 3일 밝혀졌다.   앞서 대한상의는 지난 달 28일 '초중고 교과서 검토의견 및 수정안' 자료를 교과부에 건넸다. 이 단체의 이같은 요구는 2003년·2005년·2007년에 이어 모두 4번째다. 이번에도 대부분의 신문들은 대한상의가 낸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초중고 교과서 60여 종에서 모두 337개의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대한상의가 만든 '편향성' 개선안은 '친미·친일·자학사관'에 근거한 개악안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가 교육부에 건넨 A4 용지 105쪽 분량의 원문을  분석한 결과다.  일제 토지조사사업 목적, '토지약탈'에서 '근대제도 확립'으로

다음은 대한상의가 변경을 요구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토지약탈…" (고교 근현대사 166쪽 <천재교육>)→ "목적은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고교 근현대사 <두산> 259쪽)→ 자주독립국가 능력 가졌는지 의문.

"중국군의 개입으로…"(고교 국사 125쪽)→"중공군"으로 변경.

"(유신헌법은) '긴급조치'라는 초법적인 권리를 부여…" (고교 근현대사 <금성> 288쪽)→유신헌법상의 권리이므로 '초법적' 부분 삭제

"(기업을) 소유자 중심 체제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변화해야…" (고교 경제 <두산> 134쪽)→편향적 시각이므로 삭제.

"영화산업은 미국 할리우드 대자본의 물량 공세에 맞서…" (고교 국사 331쪽)→'대자본의 물량공세' 운운은 반미적 언급이므로 삭제.

"인류 발전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사회의 중간 계층을 많이 늘려야…"(중2 사회 <동화사> 165쪽)→중간 계층 늘려야 한다는 논리 불명확으로 삭제.

▲ 대한상의가 수정을 요구한 초중고 교과서. ⓒ 윤근혁


대한상의가 교과서 분석을 맡긴 학자들은 모두 3명.

이 가운데 역사 부분을 담당한 이는 뉴라이트 계열로 언론에 오르내린 전 아무개 서울대 교수(환경대학원, 사회학) 단 한 명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 교수는 최근 논란을 빚은 <한국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했고, 4·19혁명 폄하 논란에 휘말린 교과서포럼 소속이다.

대한상의 "경제는 자신있는데 역사 쪽은 좀..."

이에 대해 박동민 대한상의 윤리경영팀장은 "경제 쪽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역사 쪽은 문제제기 수준으로 봐달라"고 한 발 빼는 자세를 나타냈다. 또한 보고서를 작성한 전 교수는 뉴라이트 활동 관련성에 대해 "이번 대한상의 보고서 작성은 활동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과부 관계자는 "대한상의 자료를 전체 교과서 집필자에게 전달해 수정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신성호 전교조 교과모임연합 사무국장은 "친일·친미 자학사관으로 채워진 교과서를 학생들이 볼까봐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친일' 황당 내용 왜 들어갔나 했더니...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확립"
"광복 자체를 민족독립운동의 결과로 주장할 수 없음"

이 같은 이상한 주장을 담은 대한상의의 요구안이 나왔다. 더 기막힌 일은 이를 바탕으로 교과부가 교과서 개정작업을 일부 진행하고 있다는 것. 신문들이 한 목소리로 대한상의의 발표내용을 '받아쓰기 식'으로 대서특필한 탓이다.

이 단체의 주장 가운데는 새겨볼 만한 것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 내용에서 친미·친일·자학사관이 깔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가 이런 시각을 두드러지게 표출한 교과서 과목은 역사 분야다. 이 단체는 "국사 39건, 근현대사 138건이 편향성 등을 나타냈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06년 11월 30일 오후 2시, 서울대 사범대 교육정보관. 교과서포럼 행사가 열리는 도중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4·19혁명 희생자 유족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5·16을 혁명으로 표현하는 대신 4·19를 학생운동으로 폄하'하는 내용의 대안 교과서 제작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이 교과서포럼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한명은 서울대 전 아무개 교수. 그가 바로 이번 대한상의의 교과서 역사부문 수정안을 만든 유일한 학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 교수는 지난 3일 전화통화에서 "(대한상의 의뢰를 받고) 몇 달 동안 교과서 검토를 했다"면서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근대토지소유제도 확립이고 약탈적인 성격도 있다고 봤기 때문에 수정안에 넣게 됐다"고 설명했다.

중국을 '중공'으로 표현토록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전 교수는 "중국군이라고 표현하면 대만군과 헷갈린다"면서 "중공이라는 표현은 중국공산당이란 뜻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줄임말"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공'이라는 교과서 내용을 '중국'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기업가 시각이 짙게 깔린 역편향 요구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기업을) 소유자 중심 체제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변화해야…(고교 경제 <두산> 134쪽)"라는 내용을 '편향적 시각'이라고 낙인찍으면서 "삭제하라"고 요구한 것이 대표 사례다. 후진적인 오너경영을 두둔한 것이다.

대한상의는 "인류 발전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사회의 중간 계층을 많이 늘려야…(중2 사회 <동화사> 165쪽)"란 내용도 '중간 계층 늘려야 한다'는 논리가 불명확하다면서 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사회통념을 뛰어넘는 경솔한 자세란 지적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넷<교육희망>(news.eduhope.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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