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언론 모독'에 관대한 언론들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정몽준과 청와대의 모욕에 왜 무관심한가
▲ 4.9총선을 앞두고 '여기자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정몽준 한나라당 후보가 3일 오후 MBC측에 사과의 뜻을 전한 뒤 경영센터 건물을 나서고 있다. ⓒ 남소연
정몽준 후보의 행동은 MBC 취재 기자 개인에게는 더 할 수 없이 모욕적인 행동이었다. MBC 여기자로서는 정말 황당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대낮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기자 신분을 밝히고, 후보로서는 가장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을 물은 기자의 질문에 한마디 응답도 없이 뺨을 툭툭 칠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그는 "다음에 보자"고 했다고 한다. 그의 행태가 비단 한 여기자에 대한 모욕스런 성희롱일 뿐만 아니라 기자와 언론 전체에 대한 모독인 까닭이다.
논란이 되자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부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여기자를 성희롱 하려 했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왼팔로 어깨를 툭 치려다 순간 본의 아니게 김 기자의 얼굴이 손에 닿았다고"고 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MBC를 찾아 김 기자 등에게 사과한 후 "며칠 동안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상태에서 왼손으로 김 기자의 뺨을 건드렸다"고 공개 사과했다. 단순한 '실수'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엉겁결의 '실수'로 탈바꿈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엉겁결에라도 MBC 여기자의 '질문'에는 응답하지 않았을까. 그의 뉴타운 공약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뉴타운 추가 지정에 반대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된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은 잠결에 있었더라도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질문이다. 그의 아픈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면 부족으로 인한 엉겁결의 실수라니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기자와 언론을 어찌 보기에 "다음에 보자"며 그런 식의 행태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인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기사 가치 판단까지 챙겨주는 '친절한 청와대'
기자와 언론에 대한 모독은 청와대에서도 확인된다. 청와대 대변인실이 잘못 내보낸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내용의 보도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던 때 보도해주지 말 것을 거듭 요청한 이동관 대변인은 "왜 보도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설명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응대했다.
"굳이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내용을 굳이 쓰겠다는 이유가 뭔가?"
언제부터 기사 가치 판단까지 청와대 대변인이 알아서 해주었다는 이야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녹취록 전문을 내보낸 대변인실의 '실수'를 한 번 봐달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공개된 자료에 대해 "기사로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많지 않다"면서도 분명한 이유를 대지 않고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상식의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내용을 굳이 못쓰게 하는 이유가 뭐냐"는 기자의 끈질긴 이의 제기에 이동관 대변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으로 나가면 이야기가 어렵다"며 "나머지는 기자단에서 결정해 달라"고 했다.
▲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달 25일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마친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박창기
두 가지 사례에서 얼핏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두 사람의 언행 모두 자신들이 불편한 가운데 나왔다는 것이다. 정 후보는 아픈 곳을 지적받은 질문에 "다음에 보자"며 대신 여기자의 뺨을 만졌다. 이동관 대변인은 기사가치 판단까지 기자 대신 해주면서 대변인실의 '실수'를 만회하려 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사람 모두 기자와 일상적인 접촉을 갖고 있으며, 기자와 언론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정몽준 후보는 대선 후보까지 했던 정치인이자 국제적인 뉴스메이커이기도 하다. 이동관 대변인은 권부의 핵심에서 대언론창구를 맡고 있으며, 기자 출신이다.
두 사람의 이런 언행을 보자면 이들이 한국의 기자와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이런 식인지 착잡해진다. 아무리 기자의 가치가 떨어지고, 언론에 대한 신뢰가 밑바닥이라고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런데도 정작 그 당사자들인 다수 언론은 그리 모욕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다. 모욕 불감증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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