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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의한 성적 오브제만 넘쳐나더라

[리뷰] 연극 김현탁 <산불> 톺아보기

등록|2008.04.07 11:08 수정|2008.04.07 11:08

▲ 연극 김현탁의 <산불> 입장권 모습. ⓒ 이승배

한바탕 멋들어진 판이 벌어지는 동안 원작자 차범석이 희곡 <산불>에 녹이려했던 고뇌의 흔적들을 찾아 헤맸지만,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아쉽지만 연출가 김현탁이 재구성한 <산불>에는 무성의한 성(性)적 오브제만 넘쳐났다.

야시시한 네글리제를 입은 배우들은 어깨와 허벅다리를 훤하게 드러낸 채 맨발로 무대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잔 근육을 뽐내는 남자 배우가 웃옷을 벗어던지고 엷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조금씩 비틀면, 새하얀 조명은 한 발짝 물러나 수줍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당연히 즐거워야하는데,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여기엔 분명 이유가 있다.

'불(不)친절'한 현탁씨

"뭔 소리야?" "대체 무슨 얘기인 줄 모르겠다" "어렵다" 연극을 보고난 뒤 많은 관객들은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종합해보면, 결국 "말하고 싶은 주제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는 차범석의 희곡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차범석의 <산불>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대 초반, 인적이 뜸한 지리산 깊은 산골에 위치한 P부락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는 남자가 없다. 전쟁 통에 아들과 남편을 잃은 한 많은 아낙네들만 있을 뿐이다.

사건을 이끌어가는 여성들은 젊은 과부들. 며느리인 점례는 스물여덟, 사월은 스물여섯 살이다. 젊은 나이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홀로 사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인적이 거의 없는 깊은 산골,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든 시절인데, 그 곁에 남자까지 없다.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비들의 추적을 피하다 다리를 다친 규복이 마을에 찾아온다. 그토록 기다렸던 남자다. 점례와 사월이 규복에게 광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 연극 김현탁 <산불>에서 배우들이 여자 밖에 남지 않은 부락의 애처로운 상황을 무대 위에서 펼쳐보이고 있다. ⓒ 이승배

반면 김현탁이 연출한 <산불>은 너무나 '불친절'하다. 이 모든 내용이 무대 왼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5~6초 동안 글자 몇 개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다. 특히 화면 크기도 작아, 무대 왼쪽 끝부분이나, 오른쪽 모서리 쪽에 앉은 사람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작품 소개 글에서는 "원작을 보지 않아도 된다"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었다.

"원작 스토리는 최소화했다"고 한 것은 거짓에 가깝다. 실제 연극 기본 뼈대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아, 내용을 아는 사람은 훨씬 이해하기 편하다. 이 탓에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배우들의 연기만 빛이 바랬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화려하지만 위험한 장치들

연극 중반이 지날 무렵, 무대 위에서 계란 한 판 정도를 아래로 떨어뜨린다. 누렇고, 끈끈한 액체가 남성의 정액을 연상케 하는 소재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대가 바뀌면서 깨진 계란을 조금 치우기는 하지만, 시간 상 한계 때문에 바닥에 끝날 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다.

▲ 연극 김현탁의 <산불>에서 배우들이 마을에 찾아온 남성 '규복'이 죽은 뒤 허탈한 부락 아낙네들의 모습을 형상화해 연기하고 있다. 무대 뒤쪽에 보이는 높이 솟은 불꽃이 다소 위험해보인다. ⓒ 이승배


앙상한 철제 침대 위해 여자 배우를 태운 채, 남자 배우가 세차게 돌리는 장면에선 혹 미끄러지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실제로 무대 인사를 하러 나올 무렵, 한 여자 배우가 계란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극 후반에 고기를 굽는 장면에서도 불필요한 불꽃쇼는 다시금 마음을 졸이게 한다. 옆에 놓인 소화기가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눈살 찌푸리게 하는 공연 운영

▲ 연극 김현탁의 <산불> 공연 시작 전 휴대전화 시계는 오후 8시22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날 공연은 본래 오후 8시 정각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 이승배

연극도 예정된 시간을 무려 20여 분 넘게 보낸 뒤 시작해, 관객들에게 빈축을 샀다. 지난달 27일, 오후 8시 공연을 보러 15분 전쯤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10분 뒤, 공연 시간이 다 됐는데도, 빈 자리가 꽤 많았다. 특히 제일 가운데 있는 좌석들만 비어있었다.

오후 8시 10분.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 공연은 도무지 시작하려 들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공연이 늦어져 죄송하다"는 안내 방송도 없었다. 극장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돌아다니며 지정된 좌석에 앉았는지를 확인하고 다닐 뿐이었다.

20분 뒤 쯤, 출입구서 나이든 사람 몇몇과, 대학생들 여럿이 몰려와 빈 좌석을 채웠다. 그 뒤에도 관객들을 계속 들어왔고, 대부분 어린 학생들처럼 보였다.

이에 대해 한 관람객은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일찍 왔는데 잘 보이지도 않은 구석자리를 주고, 게다가 공연 시간이 30분이 다 지났는데도 시작도 안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공연은 대학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에서 열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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