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투표하는 날, 더욱 심란한 서민이에게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조각난 희망이라도 던져라

등록|2008.04.08 21:08 수정|2008.04.08 21:09
서민아, 또 투표일이구나. 너는 지난번 선거 때도 이젠 투표나 마나 마음만 심란하다고 했었지. 그러고서 넌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었다. 내가 네 그 말을 듣고 흥분해서 무어라 하자 너는 "너나 잘난 척하지 말라"고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지. 그 다음 너의 말이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절망하기 싫어서 이명박 찍었다."

너는 그렇게 말했다.

한 때는 너에게도 열정이 있었지

그래, 나는 기억한다. 한때 정치에 흥분했던 너를. 5년 전, 이제 지긋지긋한 체념의 시간을 넘어서 이제야 무언가 이룰 것 같다며 흥분했지. 너는 무언가 새로움을 던져줄 수 있을 것 같았던 노무현 대통령을 무척 좋아했다. 수줍음 많던 네가 노사모라도 들어가 선거 운동에 나설 고민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급기야 대통령 탄핵 때는 가족 손까지 이끌고 거리에 나섰지. 학생 시절, 용기가 없어 못 나섰다고 눈물 흘렸던 네가 그땐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며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뒤에 네가 배운 것은 절망이었다.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지켰다는 자부심은 잠시였고, 기나긴 어려움과 배신에 절망했지.

그렇게 속고 또 찍냐는 네 말에 할말이 없었다

자라는 자식들의 사교육비는 높은 줄 모르고 폭등하는데 직장은 갈수록 불안해진다며 간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도 어두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술이 불콰하게 오른 후에 네 입에서 그래도 만날 자기들은 잘했다고 떠드는 정부 여당 386 나리들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왔었다.

"그 놈들이 이럴 줄은 몰랐다. 이럴 줄은 몰랐어..." 너는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양극화가 어떻네, 비정규직이 어떻네 그런 얘기를 잘은 몰라도 너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네가 지켰다는 그 대통령의 정부 밑에서 삶은 더더욱 힘들어 졌노라고.

네가 차라리 이명박을 찍겠다 했을때 내가 "너 미쳤냐? 차라리 정동영을 찍어라"고 하자 너는 이렇게 받아쳤다.

"그렇게 속아놓고 또 그 놈들 찍으면 그게 진짜 미친 놈이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래, 지금도 '그 놈들'은 대학 등록금 천만원 시대도, 한층 불안해진 치안도, 한층 더 팍팍해진 삶도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도 있었던 문제라는 것에는 입을 싹 닫은 채 마치 갑자기 해결사가 될 것처럼 떠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투표일에 너의 선택을 기다리는 희망들이 있다

너는 절망하기 싫어서 다른 놈을 찍었다지만 그 선택이 처음부터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어 몰입교육이니, 고소영, 강부자니 할 때마다 너는 더욱 참담해졌다. 이젠 너는 정치에 '정'자도 꺼내기를 지긋지긋해 한다.

총선 투표일, 너는 그냥 집에서 잠이나 실컷 잘거라고 했다. 누굴 찍어서 무엇이 바뀔 거냐고 했다. 이 놈의 정부도 바랄 거 없고, 옛날 그 놈들 또 찍는 미친 놈도 되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야, 절망은 너만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소위 '그 놈들'처럼 주목을 많이 받진 않지만 꾸준히 '진보'의 이름으로 너와 같은 이들을 대변하려고 애써온 사람들도 너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너는 그러면 또 그럴 것이다. 그들도 얼마 전 TV와 신문에서 난리 난 것들을 보면 싸우고 쪼개지고 볼짱 다본 것들 아니냐고.

하지만 친구야. 싸움이 끝난 후 다시 TV와 신문들이 관심을 돌렸을 때 그 뒤에서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존의 틀을 또 깨고 나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들의 이름은 너에게 끝내 절망을 안겨준 이들에 가려 투표용지 아래로 밀려나 있을지 모르지만 연두색 정당 투표용지에서라도 여전히 너는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미래는 기대해볼 수 있지 않겠니?

서민아,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그들을 찾아라. 그리고 땅에 떨어졌지만 그 조각조각 남아 있는 희망이라도 새로운 '진보'를 일구어 가는 그들에게 던져 주어라.

누구를 선택하던 당장 네 삶에 아무 상관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지긋지긋하다고 모든 것을 내팽겨쳐 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남은 조각이나마 희망을 던지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너는 결국에 피어날 수 있는 그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니?

너는 한달 한달 먹고 살 걱정하는 내사정 뻔히 알면서도 속편히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부럽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투표하는 날, 그 남은 희망이나마 던질 수 있는 네가 무척 부럽단다.
덧붙이는 글 김보영 기자는 영국 요크대학에서 박사과정으로 영국 사회 서비스 정책 발전에 있어서의 정치 사상의 역할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글속에서의 '서민'은 말 그대로 우리 사회 서민을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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