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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페서, 이제 그만들 하시면 어떨까

[교수가 교수에게] 젊은 영혼들에게 비루함을 가르치는가

등록|2008.04.10 16:45 수정|2008.04.10 16:45

▲ '폴리페서'도 걸어가면 길이 되는 것인가. ⓒ www.sxc.hu

"길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길이 된다."


일찍이 중국의 작가 노신은 소설 <귀향>에서 명쾌하게 말했다. 그곳이 어디든 사람 발길 닿는 곳이 길이 된다는 뜻이다. 아주 줄여서 말하면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노신의 말이 맞는가?

요즘 자주 이야깃거리가 되는 '폴리페서 '(polifessor) 문제로 시야를 돌려보자.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영어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뜻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다.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실제정책으로 연결하거나 그와 같은 활동을 통해 정관계 고위직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교수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폴리페서, 무엇이 문제인가

교수가 정치한다고 해서 잘못된 일은 아니다. 선진국에서도 교수들의 정치참여는 활발하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만큼 밀실야합이나 물밑거래 같은 불투명한 정치행태는 드물다. 뛰어난 정치 사상가이자 정치인이었던 공자도 "오래 공부하고도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음은 어려운 일"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왜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교수의 정치참여가 문제일까. 그것은 폴리페서가 교수라는 직업을 이중적으로 향락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교수(敎授)'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 그 첫째 의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런데 교수가 연구는 고사하고 교육마저 팽개친 채 엽관행각을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병폐가 아닐 수 없다.

폴리페서의 목표는 개인적인 입신양명과 부귀영화에 있다. 이름을 날리고 유명해져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회의원이나 고위관료로 발탁되는 게 그들의 귀착점이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이데올로기도, 개인적인 신념도, 이상과 꿈도 쉽게 바꿔버린다. 얼마나 많은 교수가 출세를 위해 자신의 이념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던가.

폴리페서들의 해악은 그들의 작업장이 대학이란 교육현장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하다. 대학에서 인격과 학문을 배우고 세상에 나가는 젊은 영혼들에게 성공신화 창출을 위한 야합과 자기합리화의 표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이면서 더 큰 이익을 위해 부나비처럼 떠도는 지식인들의 행태는 지름길을 달려가는 비루한 짓이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정당과 언론은 선거결과를 두고 갑론을박 논쟁 중이다. 적어도 4년 정도의 정치지형이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참에 형성된 정치 구조는 남북한 구성원 전체와 주변 강대국들의 역학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다. 정치로부터 우리가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까닭이.

"백성 위에 있고자 한다면 겸손한 말로 자신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한다면 백성 뒤에 서야 한다."(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무위자연을 설파한 노자는 <도덕경> 66장에서 정치 지도자의 제1과 제1장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폴리페서들은 이런 명제에 얼마나 충실한가. 그들은 겸손하며, 그들은 백성 뒤에 서 있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전문성을 내세우며 그들은 대중을 훈계하고 가르치려 든다. 언제나 앞장서서 길을 가리키고 '나를 따르라'고 소리 지른다. '어륀지'인지 '아륀지'가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 귓전을 맴돌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는 도덕적이고 사회-정치적인 하자가 발견되어 낙마할 때조차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와 민족, 경쟁력과 성공신화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심각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기회주의적인 폴리페서들의 기나긴 행렬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제 그만들 하시면 어떨까!

폴리페서,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 교수의 의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인데 교수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면 사퇴해야 하지 않을까. ⓒ www.sxc.hu

교수들에게 정치활동을 허하라! 하지만 단서가 붙는다. 정치하기 전에 교수의 본분을 다하라. 제대로 가르치고 평가받아야 한다. 교수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면 교수직을 사퇴하라. 든든한 바람막이나 버팀목으로 교수직 내지는 총장직을 지키는 행위는 비겁한 짓이다. 당당하게 정치하라.

이런 와중에 서울대학교에서 폴리페서를 제어하는 제도적 방침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좋은 일이다. 보다 완비된 법과 제도를 통하여 우리 사회의 작지 않은 환부를 도려내겠다는 의지는 좋아 보인다. 하지만 법망의 촘촘한 그물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큰 고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법 이전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유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폴리페서 문제를 두고 논쟁해야 할 때다. "나의 불 같은 사랑과 타인의 불륜"이란 공식을 주장하는 폴리페서들이 정치판에 넘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교육현장의 주역인 교수들의 정직하지 못한 자세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지게 된다." <논어> '자로 편'

정치와 명분의 상관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공자의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명분이 없는 일은 하지 말라"고 어른들은 가르쳤던 것이다. 정치가 정치답고, 제도와 법이 또 그러려면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그릇이 거기에 합당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법과 제도를 따르고, 나라가 온전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입신출세를 목적으로 연줄을 대고, 다시 엮고 짜는 행태는 해괴하다 못해 희극적이다. 우리는 그런 짓을 정치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벼슬자리를 위해 육신과 영혼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거리에 다름 아니다. 그 같은 행태의 악영향은 깊고도 오래도록 상흔을 남긴다. 유신시대의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생각해보시라.

이제라도 지난 시대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주장했던 수많은 정치교수들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그것이 결과한 시대의 어둠과 작별하면서 보다 아름답고 밝은 다가올 날들을 예비하면 어떻겠는가.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어린것들은 신록으로 몸 단장하는 느티나무들처럼 새롭게 태어나고 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김규종 기자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이자 경북대 교수회의 부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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