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정든 일터로 돌아갈 거예요"
이랜드 파업 300일... '아직도' 싸우고 있는 노조원을 만나다
약속 장소인 북 카페에 도착했다. 헉!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통 오전 10시에 문을 여는데, 오늘은 사정상 낮 12시에 문을 연단다. 낭패다. 북 카페가 찻값도 저렴하고 분위기가 있어 이야기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때 전화가 온다. 만나기로 한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 조합원 최승이(가명·34)씨다.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곳을 찾았다. <은평시민신문>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시간도 아낄 겸 택시를 타자고 했다. "괜히 돈 쓸 필요 있어요. 걸으면서 이야기하면 좋잖아요", 알뜰함이 배어 있다. 덕분에 3월 말 따스한 평일 오전의 봄볕을 맞으며 15분간 거리를 걸었다.
최승이씨는 작년 6월부터 지금까지 이랜드와 힘겨운 싸움을 해오고 있다. 점거와 집회의 연속, 폭력과 폭언을 당하며 뜨거운 여름부터 차디찬 겨울까지 아스팔트 위에서 보냈다. 한 때 언론에 부각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외로운 싸움을 있는 이랜드 여성노동자들.
모르는 이들은 말한다. "아직 해결 안 되었나요?", 그렇다. 이랜드 비정규 조합원들은 아직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는 계속되고 있다.
아이들 학원비 마련 위해 시작한 '비정규직'
이날, 최승이씨는 오후에 학부모총회가 있어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가 다니는 학교에 가야한다고 했다. 총회에 나가면 아이들 책을 공짜로 받아올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전에 짬을 낸 것이다. 최씨는 증산동(서울 은평구) 토박이인 남편과 함께 삼남매를 키우고 있다. 초등학교 1·2·3학년 연년생이다. 24살에 같은 직장을 다니던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열심히 일하고 속이 깊은 모습에 반했단다. 결혼 후엔 평범한 가정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러다가 이랜드 홈에버 월드컵 점에 캐셔(계산원)로 들어간 것이 2004년도다. 아이들 피아노며 미술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기 위해 택한 길이었다. 70~80만 원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아이들 학원비를 뺐다. 또래에 뒤처지지 않고 아이들의 재능을 채워주고 싶어서였다. 여느 엄마들과 다를 바 없었다.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불안했지만 고정수입이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회사는 최씨를 힘들게 했다. 택시비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 연장근무 5분을 앞두고 퇴근을 강요했다. 다리가 아파도 앉지 못하고, 화장실을 마음대로 못가게 했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승이씨는 불평 없이 일에 적응을 잘 하는 성격이었다. "'근무시간 연장 해줄 수 있냐'가 아니라 '연장해' 한마디였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포스(계산대)를 열면 계속 일하고, 닫으면 일을 멈춰야 했다.
그러던 작년 6월 파업 이후 승이씨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회사는 7월 1일부로 시행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되기 직전 편법을 동원했다.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기 위해 용역으로 전환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해고했다. 홈에버로 인수되기 전 까르푸 노사는 18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 노동자에 대한 고용승계를 약속한 상태였다. 억울하고 답답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승이씨는 작년 7월 이랜드 월드컵 점 점거 때 마지막까지 위원장 곁을 지키다 연행됐다.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이 찍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조합원이다.
당장 파업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피아노, 수영학원도 다 끊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가 힘들다고 하니까 이해는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이들한테 미안한 일이 계속 생긴다. "엄마 시키는 대로 왜 안 해? 응?" 보채는 아이들은 분풀이 대상이 된다. 그럴 때면 말하고도 미안하다. 정작 자신이 부당한 대우에 참고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당당하게 살려면 부당함에 항의하는 가르침이 더 필요할 듯해요."
남편과의 위기도 있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해주던 남편이 투쟁이 2~3개월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한창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 걱정과 아내가 힘들까봐서이다. 이럴 때 맞불작전은 위험하고 승산도 없다. 최씨의 위기 대처법은 짐짓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다.
최씨는 지금도 조용히 집에서 나와 투쟁현장에 결합한다. 이런 아내의 행동을 남편도 잘 안다고 한다. 알면서 넘어가는 속 깊은 정이다. 남편 칭찬 뒤에 최씨의 애교 섞인 투정도 이어진다. 최씨는 동네에서는 팔짱도 안 끼는 남편이 야속하다고 투정한다. 아이들 엄마가 예쁘고 귀여워 보이는 순간이다.
9개월 동안의 투쟁은 승이씨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개개인이 '노동자'란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많은 것 같아요. 노동자라 그러면 왠지 '하류'이미지랄까요"하자 내가 말을 받았다. "홍세화 선생이 늘 강조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의 문제군요." "그런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고요(웃음)."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세상이 올까요?"
사실 최승이씨가 초면은 아니다. 투쟁현장에 자주 가서 연대를 했기 때문이다. 최승이씨는 몇 차례 기억에 남는 말을 했다. 초창기에는 이렇게 물었다. "뭐하시는 분들인데, 이렇게 열심히 연대를 해주시죠? 혹시 돈 받고 하는 것 아닌가요?" 앞장서 열심히 싸우는 이들은 (돈을) 더 받는 것으로 오해했다고도 했다.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안다고 했던가. 연대란 그런 것이다. "그런 오해하는 조합원들 지금은 없겠죠."(웃음)
몇 달 뒤에 만났을 때는 눈을 휘둥그렇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노동해방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리를 옮겨가며 묻는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내 답변은 이랬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을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답을 구했는지 궁금했다.
최씨는 말한다. "돈이 필요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좋아해서 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는 길. 나아가 모두가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 사회는 가능할까?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다. 그 첫 공간이 노동조합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은 물론 노동조합을 소중히 돌보고 있는 최승이씨다.
"연대를 바라기 전에 현장의 조합원들이 먼저 깨우치고 적극 참여해야 해요." 점점 줄어드는 집회 참여 조합원들로 인해 힘이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최씨의 한마디 한마디는 동료 조합원들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 있다.
"너희들 지금까지 한 일이 뭐가 있어?" "(연대 투쟁하러) 지방 가라면 갔어? (점거농성 시) 자라고 할 때 잤어?" 답답해서 내뱉는 누군가의 숱한 말들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공격을 받으면 보호하고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공격적인 발언이 미워서 '차라리 안 나오고 말지'하는 조합원들도 있다고 한다.
"지도부를 믿고 옆에 동지들을 믿고, 뒤에 오는 이들은 끌어당기고 같이하려는 노력이 중요해요."
김건모의 <핑계>란 노래를 좋아한다는 최씨.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노랫말을 웅얼거린다. 현재 이랜드 노조와 노동자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최씨는 분명 자라고 있었다. 마치 대나무가 마디가 있어 높이 자라는 것처럼. 누군가 노동운동을 해왔고, 지금은 우리가 그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함'을 좌우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최씨. 두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번뜩이는 말들은 평범함 속에 담긴 비범함이 엿보였다.
"반드시 정든 일터로 돌아갈 거예요."
이랜드 투쟁이 승리해 노동자들이 복직하는 날, 산을 좋아한다는 최승이씨와 산행을 같이하고 싶다. 하산 길에 파전에 막걸리 한 잔도 걸치면서….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곳을 찾았다. <은평시민신문>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시간도 아낄 겸 택시를 타자고 했다. "괜히 돈 쓸 필요 있어요. 걸으면서 이야기하면 좋잖아요", 알뜰함이 배어 있다. 덕분에 3월 말 따스한 평일 오전의 봄볕을 맞으며 15분간 거리를 걸었다.
모르는 이들은 말한다. "아직 해결 안 되었나요?", 그렇다. 이랜드 비정규 조합원들은 아직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는 계속되고 있다.
아이들 학원비 마련 위해 시작한 '비정규직'
▲ 작년 10월 연신내 물빛공원에서 진행된 목요촛불문화제에서 참여한 이랜드일반노조 여성노동자들. ⓒ 이수현
그러다가 이랜드 홈에버 월드컵 점에 캐셔(계산원)로 들어간 것이 2004년도다. 아이들 피아노며 미술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기 위해 택한 길이었다. 70~80만 원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아이들 학원비를 뺐다. 또래에 뒤처지지 않고 아이들의 재능을 채워주고 싶어서였다. 여느 엄마들과 다를 바 없었다.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불안했지만 고정수입이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회사는 최씨를 힘들게 했다. 택시비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 연장근무 5분을 앞두고 퇴근을 강요했다. 다리가 아파도 앉지 못하고, 화장실을 마음대로 못가게 했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승이씨는 불평 없이 일에 적응을 잘 하는 성격이었다. "'근무시간 연장 해줄 수 있냐'가 아니라 '연장해' 한마디였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포스(계산대)를 열면 계속 일하고, 닫으면 일을 멈춰야 했다.
그러던 작년 6월 파업 이후 승이씨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회사는 7월 1일부로 시행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되기 직전 편법을 동원했다.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기 위해 용역으로 전환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해고했다. 홈에버로 인수되기 전 까르푸 노사는 18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 노동자에 대한 고용승계를 약속한 상태였다. 억울하고 답답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승이씨는 작년 7월 이랜드 월드컵 점 점거 때 마지막까지 위원장 곁을 지키다 연행됐다.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이 찍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조합원이다.
당장 파업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피아노, 수영학원도 다 끊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가 힘들다고 하니까 이해는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이들한테 미안한 일이 계속 생긴다. "엄마 시키는 대로 왜 안 해? 응?" 보채는 아이들은 분풀이 대상이 된다. 그럴 때면 말하고도 미안하다. 정작 자신이 부당한 대우에 참고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당당하게 살려면 부당함에 항의하는 가르침이 더 필요할 듯해요."
남편과의 위기도 있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해주던 남편이 투쟁이 2~3개월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한창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 걱정과 아내가 힘들까봐서이다. 이럴 때 맞불작전은 위험하고 승산도 없다. 최씨의 위기 대처법은 짐짓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다.
최씨는 지금도 조용히 집에서 나와 투쟁현장에 결합한다. 이런 아내의 행동을 남편도 잘 안다고 한다. 알면서 넘어가는 속 깊은 정이다. 남편 칭찬 뒤에 최씨의 애교 섞인 투정도 이어진다. 최씨는 동네에서는 팔짱도 안 끼는 남편이 야속하다고 투정한다. 아이들 엄마가 예쁘고 귀여워 보이는 순간이다.
9개월 동안의 투쟁은 승이씨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개개인이 '노동자'란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많은 것 같아요. 노동자라 그러면 왠지 '하류'이미지랄까요"하자 내가 말을 받았다. "홍세화 선생이 늘 강조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의 문제군요." "그런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고요(웃음)."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세상이 올까요?"
▲ 이랜드 노조원들이 2월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몇 달 뒤에 만났을 때는 눈을 휘둥그렇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노동해방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리를 옮겨가며 묻는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내 답변은 이랬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을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답을 구했는지 궁금했다.
최씨는 말한다. "돈이 필요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좋아해서 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는 길. 나아가 모두가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 사회는 가능할까?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다. 그 첫 공간이 노동조합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은 물론 노동조합을 소중히 돌보고 있는 최승이씨다.
"연대를 바라기 전에 현장의 조합원들이 먼저 깨우치고 적극 참여해야 해요." 점점 줄어드는 집회 참여 조합원들로 인해 힘이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최씨의 한마디 한마디는 동료 조합원들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 있다.
▲ 한 겨울,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할머니 따라 집회 장소에 온 어린 아이의 눈망울이 맑고 예쁘다. ⓒ 이수현
"지도부를 믿고 옆에 동지들을 믿고, 뒤에 오는 이들은 끌어당기고 같이하려는 노력이 중요해요."
김건모의 <핑계>란 노래를 좋아한다는 최씨.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노랫말을 웅얼거린다. 현재 이랜드 노조와 노동자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최씨는 분명 자라고 있었다. 마치 대나무가 마디가 있어 높이 자라는 것처럼. 누군가 노동운동을 해왔고, 지금은 우리가 그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함'을 좌우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최씨. 두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번뜩이는 말들은 평범함 속에 담긴 비범함이 엿보였다.
"반드시 정든 일터로 돌아갈 거예요."
이랜드 투쟁이 승리해 노동자들이 복직하는 날, 산을 좋아한다는 최승이씨와 산행을 같이하고 싶다. 하산 길에 파전에 막걸리 한 잔도 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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