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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도 안에서 싸워야지..." 진보정당들의 쓰라린 총선 성적표

민노당-진보신당, 감정의 골을 거두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등록|2008.04.10 18:54 수정|2008.04.10 18:54

▲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상임대표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18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방송을 당직자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내일 일어나면 (패배로 인해) 더 아플 것이고, 한 달이 지나면 뼈가 아릴지도 모른다."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가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한 뒤 던진 일성이다. 투표 직전까지 노 후보는 단 한 번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13전 13승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무너졌다.

말 그대로 뼈가 아릴 만도 하다. 노 후보는 "현실은 현실이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4년 전 "불판을 갈아야 한다"는 어록을 남기며 여의도에 입성했던 그는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노회찬과 함께 진보신당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 심상정 후보도 패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갑에 출마했던 심 후보는 선거운동 내내 2위였고, 결국 2위로 선거를 마쳤다. 승리한 손범규 한나라당 후보를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두 '스타'의 낙마와 더불어 진보신당 34명의 지역구 후보들 모두 낙선했다. 정당 지지율도 2.9%를 기록해 비례대표 후보 1번도 국회에 진입하지 못했다. 0.1%가 부족한 것이다. 정당 해산이라는 치욕은 피했지만, 지역구와 비례 모두 '0'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진보신당은 "총선만을 바라보고 만들어진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낙담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이렇게 진보신당이 '자위'하고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강기갑 후보는 한나라당 실세 이방호 후보를 잡았고, 권영길 후보도 재선에 성공한 것이다.

명암 뚜렷한 풍경, 진보신당의 '자위' - 민주노동당의 "만세"  

수도권에 '올인'한 진보신당이 뒷심 부족으로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질 때, 경남에 '집중'한 민주노동당은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불가능해 보이던 현실의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명암이 뚜렷했고, 그만큼 눈에 확 들어왔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모두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다"며 "비교하지 말라"고 하지만 세상인심은 그렇지 않다. 떠난 자들의 무기력한 패배와 남겨진 자의 드라마틱한 승리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왜 이런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을까. 한 때 같은 집이었지만, 이젠 각각 살림을 꾸리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이번 선거에서 무엇을 잃고 얻었을까. 표정관리에 들어간 민주노동당의 한 인사는 10일 새벽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국민승리21부터 따진다면 민주노동당의 역사가 10년이다. 이 당 하나 만들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대선을 세 번 치렀고, 꾸역꾸역 달려와 '고작' 이만큼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두 개로 나뉘었다. 진보신당이 성공하려면 더 많은 피눈물을 역사에 바쳐야 한다. 

이념의 차이? 한나라당 인사들은 모두 생각이 같아서 한 지붕 아래 있나. 민주당은 마냥 예뻐서 '굴러온 돌' 손학규를 당 대표에 앉혔나. 서로 없는 살림인데, 싸워도 안에서 싸워야 하지 않나. 우리나 진보신당이나 모두 안타깝다."

이 인사는 '시간' 대신 '역사'라는 표현을 썼다. 시간과 경험이 켜켜이 쌓인 역사라는 토대가 마련돼야 비로소 안정된 정당이 탄생한다는 말이다. 의미는 다소 다르지만, 진보신당 스스로 자신도 시간 부족을 패인으로 꼽았다.

진보신당은 10일 공동대표 명의의 논평을 통해 "3월 16일 창당해 4월 9일 총선을 치르면서, 시간과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되리라고 예상했다"며 "결국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이번 총선 결과를 평가했다.

이어 진보신당은 "처음부터 어려움을 예상하고 떠난 길이었기에 후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며 "풀뿌리 진보세력과 진보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벽돌 하나하나를 올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대장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도 10년 걸렸는데..."

▲ 제18대 총선에서 이방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가 당원들과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성호


이렇게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천명했다. '대장정'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스스로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알고 있다. 당장 원내에 진출한 국회의원 한 명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진보 세력 규합"은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다. 노회찬의 말대로 "뼈를 아리는" 고통이 찾아올 수도 있다. 

게다가 이번 총선을 통해 '진보정당 = 민주노동당'이라는 등식은 더욱 굳어졌다. 진보신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좁아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과 비례 3석, 정당 득표율 약 6%를 얻었다. 17대 총선에서 13%의 지지를 기록한 것에 비하면 반 토막 난 성적이지만, 진보의 대표주자 역할은 계속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는 강기갑 의원이 전국민 앞에서 선보인 거대한 '뒤집기 쇼'도 한몫했다.

그에 반해 진보신당이 18대 총선을 통해 대중에게 각인시킨 건 많지 않다. 진보신당은 창당 1개월 만에 선전했다고 자평하지만, 오히려 힘의 한계를 대중에게 여실히 드러낸 계기였다. 당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심상정·노회찬의 낙선이 뼈아플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서로 잘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진보의 영역과 영향력이 축소된 상황에서, 한쪽의 성장은 다른 한쪽의 위축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총선을 지켜본 적지 않은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합당을 주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의 패권을 '종북주의'라 비판하며 탈당한 평등파 계열이 만든 게 진보신당이다. 진보신당은 선거운동 기간에도 "낡은 진보"라며 민주노동당을 공격했다. 그리고 북한인권에 관한 공약을 제시하며 민주노동당과 명확한 선을 그었다.

민주노동당 역시 "당에서 부귀영화를 다 누리다 떠난 심상정·노회찬을 용서할 수 없다" "당을 분열에 빠뜨렸다" "인기 영합주의에 빠졌다" 등의 말로 진보신당 쪽을 비판했다. 겉으로는 서로 연대를 이야기하면서도 각자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두 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골은 깊다.

결국 진보신당은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을 갈 것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반 토막 난 살림을 이끌고 독자적인 부활을 모색할 것이다. 둘 사이의 접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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