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있기에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계속돼야 한다
[이라크 난민 친구들과의 이틀간의 재회 2] 앗 쌀라무 알라이꿈, 알라이꿈 쌀람 2
'앗 쌀라무 알라이꿈, 알라이꿈 쌀람'은 우리말로 '평화가 그대에게, 그대에게 평화가'라는 뜻입니다. <편집자주> |
▲ 아부 아핫메트 ⓒ 이동화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는 2003년 4월부터 이라크 내부 정치는 미국의 권력배분에 따른 다양한 권력집단이 출현하게 되었고, 미국은 사담 후세인시절의 바쓰당과 수니파에 대한 억압과 무력진압을 중점으로 둔 정책을 시도하였기에 상대적으로 그 반대지점에 있었던 정치집단에 대해서는 방조와 선택적 지원을 하였다.
이로 인해 아부 아핫메트는 수십 년간 살아왔던 자신들의 땅에서 요르단으로 자신과 가족들을 피신시켰고, 그 이후부터 난민이 되어 4년 반 동안 요르단에서 지내고 있다.
다시 만난 그날 밤 서로 떨리는 인사를 한참이나 나눈 후, 안 되는 아랍어와 영어를 섞어 쓰면서 그들과 헤어져 있었던 1년 반 동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라크 난민으로써 요르단에서 정기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그들의 5남매는 다행히 해외 기독교 NGO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큰딸 히얌은 자신의 성적표를 수줍은 듯 보여주면서 자신의 높은 등수를 자랑하였고, 막내 후세인은 계속 학교에서 말썽을 부린다고 이야기 도중 어머니에게 꿀밤을 맞았다.
▲ 한국에서 온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 둘째딸 디아나 ⓒ 이동화
근데 꽤나 늦은 시간이 되었음에도 큰아들인 아핫메트가 같이 없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핫메트가 밤 8시가 훨씬 넘어서 살짝 남루한 복장으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나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면서 연방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 왔다.
반가운 마음에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수줍은 듯 동네 슈퍼에서 일을 하고 왔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거의 1년 동안 오전에는 기독교단체 시설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동네 슈퍼에서 물건을 나르고 심부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2006년 내가 요르단을 떠났을 때만해도 아부 아핫메트는 집 근처 식당에서 한 달에 120디나르(한국돈 17만원)을 받으며 음식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요르단으로 엄청난 숫자의 난민이 밀려들자 요르단 정부는 그들의 노동을 불허하고 난민증이 없거나 난민증 유효기간이 지난 이라크 난민을 이라크로 추방하였고, 비록 난민증은 있어 추방은 당하지 않았으나 아부 아핫메트는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 13살 큰아들 아핫메트 ⓒ 이동화
현지 나이로 13세인 아핫메트의 키는 내 절반 정도이다. 그런데 그 녀석의 손을 보니 손 크기가 내 손 만하다. 그리고 얼마나 까칠한지, 그 녀석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의 손을 만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도 그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고만 있다. 뻔한 상황에 그들의 식사에 숟가락 하나 더 놓기가 미안해서 근처 슈퍼에 가서 그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바리바리 사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일 년 반만에 먹어보는 양고기 케밥과 닭고기 요리는 요르단 어느 일급호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한 맛이었다. 술을 먹지 않는 그들이기에 식사가 끝나면 '차이(아랍식 차, 설탕을 많이 넣어서 먹는 것이 특징)'를 마시며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랍어(약 1년간 아랍어 공부를 하였지만)와 영어를 섞어가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 아직도 피부병을 앓고 있는 셋째 딸 자하라 ⓒ 이동화
문틈으로 불어오는 찬 바람을 같이 맞으며 하룻밤을 보낸 후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그 다음날 그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이웃에서 이라크 빵을 만들 수 있는 화덕을 빌려와서 이라크 전통 빵을 만들어 주었다. 이라크에 약 1년간 체류한 적이 있는 나에게도 너무도 반가운 빵이었기에 연방 그 과정을 지켜보고, 막 나온 빵을 막내 후세인과 같이 슬쩍 먹고서 서로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 커다란 화덕을 이용해서 이라크 전통빵을 만들면서 행복해 하는 그들을 보면서 이 장소가 요르단 암만이 아닌 그들의 고향인 이라크 바그다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만나는 내내 웃음을 지었던 그들에게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들은 다시 어두워졌다.
1년 반 전쯤 그들과 이별을 이야기 할 때도 그랬듯이 작은 목소리로 한국에서 혹시 그들이 지낼 수는 없는지 다시 물었다. 한국의 난민정책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대답을 주저하자 그들은 알았다는 듯 다시 알라(하느님)가 그들과 나를 잘 돌보아주실 거라고 한다.
조용히 같이 차이를 마시고 그 집에서 일어날 때가 되자 아이들이 울기 시작한다. 부모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처음도 아닌데 처음보다 더 힘든 것 같다. 그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고작 "다 잘 될거야… 또 올게" 뿐이었다. 그렇게 그 집 식구들과 이별을 하고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나온 아부 아핫메트와 깊은 포옹을 하면서 이슬람 방식으로 서로 축복을 빌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 그들과 함께 ⓒ 이동화
지난 3월 20일은 미국이 현재의 상황을 만든 이라크 침공이 있은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 언론매체에서는 그날 즈음에서 이라크 관련 여러 가지 미국의 정책, 이라크의 사망자수, 미군의 사망자수, 미국 대선이 이라크에 미치는 영향들을 보도했다.
그러한 보도는 많은 사람들의 잊혀진 기억들을 되돌리지만 또한 사람들 기억에서 ‘아!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다시 그 기억을 잊혀지게 한다. 적어도 한국 정부는 이라크 침공에 동조하였으며 미국의 점령 최측근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도 점령군의 한편이었으면서 이라크의 재건과 복구를 이야기했다. 최근에는 이라크의 석유에 노골적으로 침을 흘리며 자이툰의 고생을 이라크의 희망인양 덧칠하고 있다.
아부 아핫메트와 같은 이라크의 난민은 400만 명을 넘어섰고 이라크 전체 인구의 6분의 1인 수치이다. 한 가족의 4년 동안의 난민생활을 안다는 것이 때로는 버겁기도 하다. 때로는 회피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이 나로 인한 것이기도 하기에 피할 수만은 없다. 앞으로 얼마나 그들의 고통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의 극단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이 있기에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계속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이동화씨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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