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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년의 시간을 빼앗긴... 대추리 사람들

김준호 감독의 영화 <길>을 보고

등록|2008.04.14 20:05 수정|2008.04.15 13:18

▲ 사진은 지난 2006년 5월 7일 열린, 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위한 촛불집회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금이라도 평택 통복시장에서 16번 버스를 타면 군문교를 건너고 원정리, 내리를 지나 대추리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대추초등학교 앞에 내려 정문으로 들어가면 주민들이 소원을 빌며 쌓아둔 돌무덤이 있고 한쪽 담벼락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겠지.
  운동장 한 구석에는 국방부의 침탈을 막는 방어벽이 되었던 트랙터 한두 대가 무심히 서 있을 것이다. 트랙터에는 노란색 깃발이 꽂혀 있을 것이고 그 깃발에는 주름 가득한 노인들이 하늘 높이 팔뚝질을 하며 외치던 구호들이 적혀 있을 것이다. 올해에도 농사짓자, 미군기지 확장반대, 이 땅에서 죽고 싶다, 그렇게.   학교가 무너진 잔해 위에서 아이들이 아슬아슬하게 놀고 있고 그 한 가운데 '평화'라고 쓰인 키 큰 깃발이 축 늘어져 있겠지. 바람이 불면 '평화'는 조금 활기를 찾을 테지만. 아니, 어쩌면 학교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창문마다 그려져 있던 주민들의 얼굴이 날 반겨줄지 모른다.   화가들이 창문에 그림을 그리던 날, 실물보다 못 생기게 그렸다며 불평하시던 할머니들을 그곳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학교 안 식당에는 어디 갔다 왔냐며 막걸리를 넘치도록 따라 주시던 아저씨들이 오염된 평택호에서 잡아온 붕어로 안주를 한 솥 끓이고 있을 것만 같다.
길을 만드는 방효태 할아버지

영화 <길> 포스터 헬기가 날아다니고 군인들의 막사가 있는 논에서 할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했다. ⓒ 푸른영상


영화 <길>은 지금도 그렇게 있을 것만 같은 평택 대추리·도두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군기지확장'을 통보받은 후 쫓겨나게 된 사람들의 결코 물러 설 수 없는 싸움은 4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주민들의 어떠한 문제제기도 무시로 일관하며 모든 '법'적인 절차를 마친 한국정부는 2006년 급기야 군부대까지 동원한 엄청난 물리력으로 주민들을 고립시켰다. 국방색 포클레인의 날카로운 삽날은 평생 애면글면 가꾸어 온 들판에 깊은 구덩이를 팠고 군인들은 그 둘레에 철조망을 쳤다.

김준호 감독의 카메라는 그렇게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논에서 매일 피를 뽑고 여느 때처럼 일상을 이어가는 방효태 할아버지를 따라간다. 대추리에서 나고 자라 70년을 살아온 방효태 할아버지는 뾰족한 가시철망 앞에 막사를 짓고 주둔한 군인들과 그 옆에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전경들 속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했다. 그리고 길을 만들었다.

황새울 영농단 앞 길이 파괴되어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게 되자 할아버지는 논두렁 사이를 흙으로 메워 새로운 길을 내었다. 하루종일 뙤약볕 아래서 손수레를 이용해 흙을 실어 나르고 붓고 다지며 땀을 흘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공무수행,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하는 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경이로움이었다.

영화 <길>은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력과 건강한 감수성으로 야만과 억압에 맞서 왔던 시간들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으며, 그것은 방효태 할아버지의 땀으로 한숨으로 웃음으로 눈물로 전해온다.      

은폐와 왜곡에 대한 투쟁

주민들이 대추리에서 쫓겨나 송화리 임시거주지에서 산 지 1년이 되었다.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하기 위해 지어놓은 송화리 빌라에서 주민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마음 한 구석에 고여 있는 그리움과 아픔을 토하듯 쏟아내는 주민들을 보았고, 또 반대로 그 지긋지긋한 시간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분들도 보았다.

모든 걸 내뱉는다 한들, 잊고 싶어 가슴깊이 묻어 둔다 한들 그 고통과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을 제대로 기억해내는 일, 사라지고 추방당한 자리에서 그 역사를 회복시켜 내는 일, 할아버지가 그랬듯 야만과 폭력을 거슬러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길>은 우리가 대추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김준호 감독의 작업은 왜 그토록 부단히 기억해야만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대추리를 기억하는 일은 주민들의 삶을 올곧게 복원해 내는 것이며, 그것은 은폐와 왜곡에 대한 투쟁이다.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폭동이 아니었듯, 대추리 주민들이 원했던 것은 보상금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거짓말로 여론을 호도하고 주민들을 기만했던 국방부과 언론의 보도 속에서 잊혀지고 상처받은 주민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길>은 다시 말을 건네고 있다.      

"이기고 지고 문제가 아니야,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는거야"

▲ 지난 2006년 9월, 경기도 평택 대추리 황새울 들판의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영화는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인디다큐페스티발2008'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그 때 나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감독과의 대화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어차피 수확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씨앗을 뿌린 건가요?"

이 얘기를 내게 전해 준 친구(마을에 함께 살던 지킴이였다)는 그 질문이 좀 불편했다고 말했는데, 나도 질문을 한 사람의 진의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으며, 나 또한 답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왜 매일 헬기가 위협하는 들판에서 볍씨를 뿌렸는지, 왜 패배할 줄 알면서 싸움을 이어나갔는지, 왜 계속 부수고 파괴하는 절망 속에서도 자꾸 무언가를 짓고 만들었는지. 영화의 끝부분, 935일째 마지막 촛불행사에서 방효태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길이라는 게 있잖아. 길이면 가는 거지."

할아버지는 고집스럽게 흙을 날라 길을 만들었듯이 당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쫓겨 났지만 패배한 게 아니라는 주민들의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었다.

"이기고 지고 문제가 아니야.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는 거야."

대추리를 떠나 온 후 할아버지가 내게 건네셨던 이 말을 떠올리며, 서경식 선생의 <교양 모든 것의 시작>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다시 찾아 읽었다.

"인간은 승산이 있을 때만 저항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승산없는 저항은 무의미하고 쓸데 없는 것도 아니다. 저항이 목적이고 이 저항을 통해 스스로를 인간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저항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리고 종국엔 그러한 저항을 거쳐야만 진정한 승산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애당초 승산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웃음을 기억하며

이제 16번 버스는 대추리로 들어가지 않는다. 내리 마을회관 앞에서 멈춰 선다. 그곳이 종점이 되었다. 해거름에 언덕에 서서 바라보던 노을은 아직도 마을을 감싸고 있겠지만 연둣빛 모가 자라던 황새울 들녘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붉은 노을은 알고 있을까, 왜 이제 그곳에 씨앗이 뿌려지지 않는지를, 동백꽃 같은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이유를.

4년간의 지난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 쫓겨난 대추리 사람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몇 십 년의 시간을 빼앗겼다. 땅과 집뿐 아니라 오랜 세월을 잃었고, 한올지게 살아온 이웃들의 배신을 보았고 그렇게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길>이 보여주듯 주민들의 삶과 저항은 빛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이 영화에 많이 출연해서 기분 좋다고 하셨던) 이태헌 아저씨 말씀대로 정부가 '촌놈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가하는 폭력,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자들에게 가하는 야만은 쉽게 멈추지 않겠지만 그와 동시에 민중들의 저항도 계속 될 것이다.


영화속에서 지킴이들이 '뭉게구름'을 부를 때 주민들의 얼굴에 활짝 피어나던 웃음이 영화가 끝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황새울 너른 들녘을 기억하시는 분들, 한 번도 보지 못해 아쉬운 분들 모두, 봄이 가기 전에 <길>을 한 번 만나보시기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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