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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사오는 웃지 못할 일까지...

[역사소설 소현세자 32] 포로 협상

등록|2008.04.14 15:26 수정|2008.04.14 16:38

문정전.임금이 신하들과 어전회의를 가졌던 창경궁 편전이다. ⓒ 이정근



조선인 포로들이 심양에서 매매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대신들을 불렀다.

"청나라가 백성들을 사고팔고 있다니 참담하다."

인조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우리 백성들인데 찾아와야 합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금액이 적지 않습니다."
"사신을 파견하여 청나라에게 사정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백성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총론에는 공감했으나 어떻게 할 것인가의 각론에는 의견이 달랐다. 말은 많았지만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왕실과 종친 그리고 사대부 가족은 비싼 대가를 주더라도 꼭 찾아와야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조정이 나서서 찾아와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정에서 태평하게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속환하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면 저들이 높은 값을 요구하여 괴롭힐 것이 뻔합니다. 조정에서 속환하겠다는 뜻을 정명수에게 조용히 알리고 의주에 있는 제신에게 정명수와 값을 작정하게 한 다음 우리 백성들을 속환해야 할 것입니다."

비국에서 대책을 내놓았다. 조선 출신 역관 정명수와 비밀 협상을 통하여 값을 정한 다음 전면에 나서자는 것이다.

"정묘년에는 한 사람의 값이 겨우 저포 10여 필(匹)에 불과했는데 지금 점점 값이 올라가는 것은 속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가족의 속환에 급급하여 값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럴 경우 가난한 백성은 끝내 속환할 길이 없게 됩니다. 왕이란 백성에게 있어서 귀천빈부를 마땅히 동일시하여야 합니다.

한두 명의 재물 있는 자가 많은 값을 아끼지 아니한 탓으로 수많은 사람을 이역에서 죽게 한다면 이는 심히 경중을 잃은 것입니다. 조정에서 금제(禁制)를 설치하여 사람마다 차등을 두더라도 1백 냥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저들이 높은 값을 요구하면 차라리 버려두고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이 액수를 넘기지 않는다면 저들도 유익함이 없는 줄 알고 스스로 공평한 값을 따를 것이어서 사람마다 그 소원을 이룰 것으로 여겨집니다."
- <인조실록>

우의정 최명길이 대안을 내놓았다. 조정대신들도 최명길의 안에 동의했다. 드디어 속환사로 호조참의 신계영이 임명되었다. 조정의 공식 협상대표다. 신계영은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국왕 원가광으로부터 복사서(復謝書)를 받아와 외교 역량을 증명해 보인 바 있는 협상전략가였다. 가광은 덕천가강의 손자이고 수충의 아들이다.

개별협상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섰다

신계영이 심양으로 떠나기 전 임금을 알현했다.

"조정에서 관향은(管餉銀) 2천 5백 냥으로 가족이 없는 백성을 속환하여 오라고 하였는데 어제 비국의 계사를 보았더니 호종 군사의 처자로서 포로가 된 자들을 속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수효가 아마도 7백 명은 될 듯한데 가지고 가는 것은 매우 적으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그렇다면 적당하게 첨가하여 주겠다."

신계영이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한성을 떠나는 날, 그의 뒤를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아들과 딸을 찾아 나선 사람과 부모형제를 찾아오겠다는 사람, 그리고 나라에서 하는 일은 믿지 못하겠으니 자신의 가족은 자신들이 찾아오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허리에 두둑한 전대를 둘렀다.

신계영이 한성을 출발했다는 소문이 바람처럼 번졌다. 개성과 평양 등 신계영이 지나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꼭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 관직과 성명을 적은 쪽지를 손에 쥐어주며 하소연하는 사람, 아예 전대를 두르고 따라 나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신계영이 압록강을 건널 때는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2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황궁거리. 동관에서 심양궁에 이르는 거리 ⓒ 이정근



신계영이 심양에 도착했다. 청나라는 신계영을 동관에 머물게 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세자에게 문안인사하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심양의 정보에 밝은 세자관 관원들의 자문을 받아 협상을 진행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왔다.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협상을 끌고 가겠다는 청나라의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청나라와의 협상 결과, 신계영이 가지고 간 돈으로는 6백여 명이 확보되었다. 하나라도 더 빼내오기 위하여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진척은 없었다. 협상단의 자금 사정을 파악한 청나라는 협상종결을 선언하고 세자관 출입을 허용했다. 신계영을 맞이한 세자는 노고를 치하할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신계영의 협상결과가 알려지자 이제는 개인들이 나섰다. 공식 협상은 그런 대로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개인들의 상담은 협상이라 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상거래였다. 호가와 에누리가 난무하는 장터와 같았다. 개인 협상 차 심양을 방문한 사람들은 조선에서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파악한 청나라는 속환가를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하는 청나라 사람들

전 승지 한이겸은 망연자실했다. 강화도에서 행방불명된 딸이 심양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2백 냥을 준비하여 신계영을 따라 나섰다. 딸을 데리고 있는 포로 주인은 3백 냥을 요구했다. 애타게 찾고 있던 딸을 만나고서도 딸을 데려올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한이겸은 세자관을 찾아가 예전부터 안면이 있는 보덕 황일호에게 백 냥을 빌려 청나라 사람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딸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한이겸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전 참판 권영태는 딸을 데리고 있는 사람과 협상했으나 청나라 사람이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했다. 오늘날의 강남처럼 장동 출신은 돈을 두둑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권참판의 딸은 흉기로 목을 찔러 죽어 버렸다. 그래도 권 참판은 돈을 지불했다, 결국 시체를 사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장동 홍 대감의 딸은 자색이 고왔다. 대감 딸이라는 신분을 속였지만 높은 값을 요구했다. 협상이 깨지고 돌아간 직후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에 돌입하여 결국 굶어죽고 말았다. 반면에 돈을 수백 냥 준비하고도 가족을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성 사람 이끝새의 딸은 인물이 출중하여 황궁에 들어가 황제의 시녀가 되었고 회은군 이덕인의 딸은 왕족이라는 이유로 홍타이지에게 바쳐져 황제의 제6황후가 되어 있었다. 아무소리 못하고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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