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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이 없으면 노예근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43] 화순 - 양회일 의병장 (1)

등록|2008.04.18 10:45 수정|2008.04.18 22:37

▲ 쌍산의소 의병 막사 터를 화순군 이순도 문화관광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 박도


치욕의 역사도 그대로 보존하는 서구인

1992년 여름, 유럽기행 중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들렀을 때였다. 이 도시는 대학의 도시로 젊은 분위기가 넘치고, 그들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한 낭만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 동쪽 끝 언덕에는 중세의 고성 하이델베르크 성이 있는데, 13세기 무렵 세워진 이후 대대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 시대의 양식이 혼합된 독일에서 그 아름다움이 손꼽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바라본 네카어 강과 대학촌. ⓒ 박도


그런데, 이 하이델베르크의 성벽은 전쟁의 참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있었다. 문화관광 해설사는 이 성벽은 보불전쟁 때 프랑스 군에게 파괴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구에서는 영광의 역사만 아니라, 치욕의 역사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자료로 남긴다고 하였다.

비단 서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웃 중국도 치욕의 역사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인민 교육의 장으로 쓰고 있었다. 1999년 여름, 항일유적 답사 길에 하얼빈에 들렀을 때였다. 하얼빈 교외에 있는 731(일명 마루타) 부대는 한 마디로 '땅 위의 지옥'이었다. 일본군은 여기 수용된 사람들을 사람이라 여기지 않고, '마루타', 곧 통나무로 여겼다고 한다.

▲ 제731부대 잔해인 보일러실 굴뚝 ⓒ 박도


이 부대에서 하루에 생체 실험용으로 죽어간 사람이 많을 때는 20여 명으로, 1933년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적어도 3000여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때 행해졌던 인간 생체 실험에 대한 사진과 증언 기록들이 일부 전시된 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어느 실험 대상자는 발가벗겨져 동상 실험을 받아 근육은 다 파열되어 뼈만 남은 팔을 달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개구리처럼 수술대에 놓여 일제 군의관들이 해부하고 있는 장면을 밀랍 모형으로 만들어두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소련군에게 쫓겨 이 부대 증거를 없애고자 남아 있던 생체실험 대상자 수백 명을 독살시킨 다음 분쇄기로 갈아 버리고, 부대의 주된 건물을 폭파시켜버렸지만, 일부 잔해는 남아 있는 바, 아직도 허물어진 보일러실 굴뚝은 지난날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중국은 이 부대를 '침화일군 제731부대 죄증진열관'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 들머리에는 '前事不忘後事之師(전사불망후사지사,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에 교훈으로 삼자)'라는 펼침막을 걸어두고 있었다.

▲ 위황궁 집회루 앞의 장쩌민 주석의 '勿忘' 비 ⓒ 박도


또, 길림성 성도 창춘에는 괴뢰 만주국 황궁을 '僞皇宮陳列館'(위황궁진열관)으로 개조하여 보여 주고 있는 바, 사치의 극치를 이룬 푸의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의복 장식품, 그리고 아편에 찌든 황후 완용의 밀랍 인형을 만들어 두고, 거대한 중국이 일본에 놀아난 근본 이유를 '부패 낙후 내전'(腐敗 落後 內戰)이란 세 단어로 요약하여 걸어두고 있었다.

그러면서 황궁 집회루 앞에다가 돌비석을 세운 뒤 장쩌민 주석이 '勿忘 九․一八(물망구일팔, 일본에게 침공당한 9월 18일을 잊지 말자)'라는 글을 새겨 두고 있었다.

단동의 압록강 철교에서도 그랬다. 중국은 한국전쟁 때 반 토막으로 부서진 다리를 그대로 둔 채, 새 철교를 놓고는 '勿忘'(물망, 잊지 말자)이라고 새겨 두었다. 중국인은 겉으로는 용서하는 척 웃으면서도, 그들 마음속으로는 그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치욕의 아픔을 벼리고, 또 벼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지금 중국은 무섭게 세계사에 우뚝 서고 있는 것이다.

세계인의 조롱거리였던 종이호랑이 중국, 서구 열강들이 너도나도 마구 사냥질했던 중국이었다. 지난날 문물을 전해 준 일본에게조차도 마구 찢기었던 중국이 오늘날 다시 강대국으로 도약한 근본 원인은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 결코 썩지 않은 최상층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지난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인민들 골수에 심어준 역사 교육 때문이라고 나는 진단하는 바다.

▲ 압록강 철교. 오른쪽 철교는 1950년 11월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다. 이 다리에는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그대로 남겨둔다'라고 글이 새겨져 있다. ⓒ 박도


역사를 소홀히 하는 백성

나는 지난해 10월부터 6개월째 호남의병 전적지를 구석구석 순례하고 있다. 호남의병은 꼭 100년 전의 일이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의병 수십만이 참여하고, 수만의 의병이 희생된 거룩한 전투에 견주면, 유적지가 없거나 있던 유적지조차도 거의 소멸되었다는 사실이다.

의병장들의 생가는 아파트촌으로 흔적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몇 남아 있는 곳조차 관리 소홀이나 개발로 원형을 잃고 있었다. 의병장의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의병 전적지에서는 지난날의 치열했던 전투지임을 알 수 있는 팻말조차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동행한 유족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호남의병은 전설로만 남을 처지에 있다.

이른바, 문화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역사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역사를 올곧게 기록하며, 유적이나 유물을 소중히 후세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 백성들은 역사를 업신여기거나 유적이나 유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러면서 똑같은 시행착오를 거듭 반복하고 있다.

하나의 예화로 지난날 군사독재를 물리치고자 그렇게 많은 최루탄을 마시고, 피를 흘리고서도 까마득히 잊은 채, 그 부도덕한 추종자들을 다시 나라의 지도자로 받들고는 부자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역사의식이 없는, 역사에 무지한 백성들이라고 말한다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역사 의식이 없는, 그래서 시행착오를 거듭한 나라의 백성들은 세계사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고, 천박한 노예 근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양회일 의병장 증손 양금렬씨 ⓒ 양금렬


나의 호남의병 답사는, 전남에서 전북지방으로 옮겨가고 있다. 전남지방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애초에 답사키로 예정한 곳 가운데 두 곳을 빠트렸다. 가장 큰 이유는 후손과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곳을 지나치려다가 다시 기록을 살펴보니까 의병 유적지가 가장 잘 남아있다는 화순의 양회일 의병장이 맹활약한 쌍산의소만은 빠트릴 수 없었다.

화순군청으로 연락하여 두세 다리를 거친 결과, 증손자 양금렬씨와 어렵게 전화 연결이 닿았다. 양금렬씨는 직장 때문에 고향을 떠나 노무현 대통령이 사는 경남 김해에 산다고 했다. 부산에서 자그마한 사업을 하는데, 평일에는 좀체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이 날짜를 여러 번 조정한 끝에 2008년 4월 6일 간신히 맞췄다.

나는 그 길에 전북 의병장 취재계획도 세운 바, 4월 4일은 서울에 사는 전해산 의병장 아드님 내외를 취재하고, 4월 5일은 전북 남원으로 가서 전해산 의병장 손자 전영복씨 안내로 장수에 있는 전해산 의병장 무덤을 답사한 다음 광주에서 일박한 뒤 이튿날 전남 화순 쌍산의소를 찾기로 일정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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