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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가 삼전도 항복보다 더한 치욕?

[역사소설 소현세자 34] 조선 인조시대의 '환향녀' 논쟁

등록|2008.04.18 14:06 수정|2008.05.17 13:23

압록강 철교. 끊어진 압록강 철교. 전쟁은 철다리도 끊고 인간관계마저 끊어 놓는다. ⓒ 이정근


다른 여자들은 절개 지킨다며 죽었는데 나는...

포로들이 압록강에서 배를 탔다. 푸른 물결을 가르는 나룻배에 몸을 실은 포로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지옥 같은 청나라를 벗어났다는 안도의 눈빛이었다. 살아생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희열이 뱃전을 달구었다.

가까워오는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포로들이 있는가 하면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쁨에 들떠 흥분돼 있는 사람들은 남자들이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 끌려갈 때는 돌아오기만을 바랐는데 막상 돌아오는 길목에서는 두려움이 앞섰다.

물결이 부서지는 뱃머리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수심에 차있는 여인이 있었다. 한이겸의 딸이었다. 사대부집에서 곱게 자라 장래가 촉망되는 신랑을 맞이하여 대감댁으로 시집갔다. 청나라 군대가 양철평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도성에 퍼지자 피난길에 나섰다. 목적지는 강화도. 당시 강화도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선택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피난처였다.

검찰사 김경징의 학대도 있었지만 강빈을 비롯한 궁실여인들과 함께 강화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청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들이 닥쳤다. 병조판서 이성구의 아내 권씨와 아들 상규의 아내 구씨 그리고 그의 두 딸 이일상과 한오상의 아내가 '오랑캐에게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목을 매어 죽는 것을 보았다.

'헌납 홍명일의 아내 이씨는 배를 타고 강화도를 빠져 나가려다 청나라 군사들이 가까워오자 남편의 생질 박세상의 아내 나씨와 겨우 6, 7세 된 두 아들 자의와 자동을 서로 껴안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는데 질긴 게 목숨이라고 죽지 않고 살아 돌아간다는 것이 죄업만 같았다.

압록강. 압록강 물결. 모래사장이 위화도다. ⓒ 이정근


선조의 제사를 받을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장가 가겠다

흘러가는 물결이 뱃전에 부서졌다. 고국에 돌아간다는 것이 무서웠다.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강물을 바라보았다. 압록색 푸른 물이 가슴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한이겸이 지켜보고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던 한씨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강물에 떨어진 눈물을 압록강은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배가 의주에 닿았다. 뛰어내린 포로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조국의 흙을 두 손에 움켜쥐고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살아생전 다시는 밟지 못할 것 같았던 조국 땅을 밟은 포로들은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한씨는 아버지와 함께 남행길에 올랐다. 보고 싶은 아들이 한성에 있고 하늘같은 지아비가 도성에 있지 않은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청나라에 붙잡혀간 포로들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전국에 날아갔다. 한성이 술렁거렸다. 일반 백성들은 반기는 정서였으나 사대부가(家)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돌아온 부녀자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가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한 이상의 심각한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신풍부원군 장유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외아들이 있는데 그의 처가 강화도에서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지금은 친정 부모 집에 있습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홍화문.환향녀 문제로 논쟁이 일었던 창경궁 정문이다. ⓒ 이정근



장유의 상소는 환향녀(還鄕女)의 논쟁에 불을 지폈다.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아들 장선징을 새장가 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장유의 며느리는 이번 집단 송환 이전에 돌아왔다. 부잣집 친정에서 비밀리에 거금을 주고  빼왔으나 시집에 들지 못하고 친정에 있었다.

"사로잡혀 갔다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김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의 아내 정씨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그의 할머니 영의정 김류의 아내 유씨와 어머니 박씨 그리고  할아버지의 첩 신씨, 아버지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때 김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은 것입니다. 진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죽게 하고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진표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매도하는데 그것은 김경징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쌓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의 아내 정씨는 정백창의 딸입니다. 친정의 혈통을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논쟁이 엉뚱한 곳으로 비화했다.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물어 처단한 김경징의 유령이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부녀자들이 붙잡혀 간 것은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임금이 항복하고 나라가 힘이 없어서였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나라에서 따뜻하게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송죽은 엄동설한에 빛나고 국화는 서릿발아래서 꽃을 피웁니다

"이정귀의 아내 권씨, 여이징의 아내 한씨, 서평군 서준겸의 딸이며 김반의 아내 서씨, 이소한의 아내 김씨, 한흥일의 아내 강씨, 한준겸의 첩 최씨, 이호민의 첩 한씨가 모두 자결하였습니다. 그 밖에 부인들이 절개를 위하여 죽은 것은 모두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임진왜란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적진에 잡혀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를 시댁에서 이혼하고 개취(改娶)할 것을 청하니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선왕이 하교하기를,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이 아니니 버려서는 안 된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선조(先朝)에서 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라."

인조가 소방수 역할을 하고 나섰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자들의 영혼도 받들어 주어야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숨통을 터 주어야 합니다. 끌려갔다 돌아온 그들도 다 우리의 딸들입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자결하기를 바라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천에서 목욕하고 도성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赦) 하는 것으로 간주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천은 오늘날의 홍재천이다. 도성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개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동예의지국입니다. 이호선의 아내 한씨는 토굴 안에 숨어 있었는데 적병이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 죽었습니다. 심정함의 아내 박씨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최필의 아내 정씨, 이중언의 아내 양씨, 황식의 아내 구씨, 이사성의 아내 이씨, 하함의 아내 이씨. 김계문의 아내 박씨가 절개를 지키려고 죽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헛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조선의 여인들, 누가 지켜 주어야 하는가?

여론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안 된다는 것이다. 명분은 동방예의지국이었고 뿌리는 성리학이었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자들의 정조 파절(破節)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 상황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권에서 간음한 여자를 가족이 죽이는 '명예살인'이 있듯이 자녀목(恣女木)과 도모지(塗貌紙)가 상존하고 있던 나라가 조선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안(姿女案)은 국가에서 관리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를 스스로 죽도록 유도하여 목을 매게 하는 나무가 자녀목이다. 물에 젖은 한지를 얼굴에 발라 질식사 시키는 것이 도모지다. 자녀안은 품행이 바르지 않거나 3번 이상 결혼한 여자의 행적을 기록한 대장이다. 자녀안에 오르면 그 가문의 불명예는 물론 배우자의 승진과 자손의 과거시험에도 불이익을 받았다.

여자의 정조는 곧 예와 직결되었고 여자의 품행일탈은 사헌부의 단속 대상 풍속사범이었으며 범죄였다. 가부장제 나라 조선은 부녀자들의 풍속 문란을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대부들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들이 절개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청나라에 끌려가 성적 노리개가 된 여인은 물론 심양에 끌려갔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킨 여인들마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훼절 범주에 넣고 싶은 것이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조선의 여인들. 누가 지켜 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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