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항일역사팩션 48]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2008.04.18 15:31 수정|2008.04.18 15:31
신규식은 그녀에게 세 통의 밀서를 주었다. 그리고 동경 교외에 있는 어느 집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곳에 가서 고이즈미라는 일본 노인을 만나 보라고 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 노인이 자신의 출생 사연을 아는 사람일 거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말로 묻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너무나 긴장되어서 신규식의 얼굴을 멍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신규식은 그녀의 얼굴을 안쓰러워하는 눈길로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주원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대마도를 지나자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남태평양의 거센 물결과 대륙에서 남진해 오는 북서풍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말로 겐카이나다, 한국식 발음으로 현해탄(玄海灘)은 말대로 검고 거친 바다였다. 때로는 별과 달빛과 안개, 때로는 비와 바람과 물결, 때로는 구름과 뇌성과 폭우가 있는 현해탄에는 과거와 현재의 숱한 역사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현해탄을 처음 건너며 담배를 배웠고 두 번째 건너며 여자를 알았으며 세 번째 건너며 돈맛을 익힌 것은 일본 청년이었고, 현해탄을 첫 번째 건넌 이는 소식이 없고 두 번째 건넌 이는 잔등이 굽어 돌아왔고 세 번째 건너 하얀 뼛가루로 돌아온 이는 조선 청년이었다.

아주 먼 세월 전에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성덕태자의 스승 혜자가 이 해협을 건너왔고 금각사의 화가 담징이 이 해협을 건너갔다. 박제상과 김춘추, 정몽주와 신숙주, 그리고 김인겸이 이 바다를 건너갔으며, 수많은 몽고군과 왜군이 이 바다를 찾아온 태풍 카미카제에 휘말려 죽었다.

검은 물이 뱃전에 부딪히는 족족 순식간에 색을 바꾸고 있었다. 백주원은 부서지는 하얀 포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백주원이 건넌 후 7년, 경성여고보와 동경음악학교를 다녔던 대중가수 윤심덕은 '사(死)의 찬미'를 불러 인기를 모은다.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는 음악 청년 홍난파보다는 호남 갑부의 아들이면서 유부남이기도 한 김우진을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북해도의 여관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후 현해탄에 몸을 던진다. '사의 찬미'를 부른 후 얼마 안 돼서였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는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허무란다.

그 노래의 원곡은 외국 왈츠였다. 루마니아의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도나우 강 왈츠는 서양인들이 결혼 파티에서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신파와 염세의 상징으로 둔갑한 것은 참 희한한 일이었다.

이미 백주원이 그 해협을 건너기 2년 전, 식민지 조선의 대중들은 <장한몽>의 신파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괴기스러울 정도로 위선적인 인물 이형식이 출연하는 소설 <무정>에 압도되고 있었다. 식민지는 그런 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남을 탄압하는 인간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탄압을 받는 인간들도 또 다른 모습으로 급속히 타락해 가는 것은 불평등한 인간 조건이 빚어내는 일반적 현상이었다.

동경에 도착한 백주원은 신주쿠에 가서 양장 몇 벌을 구입했다. 그리고 시부야에 있는 고급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었다. 그녀는 신규식이 지명한 인사들을 만나서 밀서를 전했다. 그녀는 유학생들에게 '상해에서 온 서시(西施)'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유학생 중에서는 중국에서 온 그녀가 자기들보다 일어와 영어를 잘하는 것을 약간 불만스럽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백주원은 주어진 임무를 모두 침착하게 수행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동경의 야마노테는 일본의 무사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신규식이 적어준 주소는 야마노테의 한 구역에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일본인 여자가 나왔다. 노인이었다. 백주원은 고이즈미라는 노인을 물었다. 그녀는 이미 백주원이 내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불렀다.

"여보! 왔어요."

고이즈미가 나타났다. 그는 백주원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백주원을 서재로 안내했다. 고이즈미가 눈짓을 하자 부인이 서고에서 사진첩 한 권을 꺼내 왔다. 고이즈미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이 없었다. 백주원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고이즈미는 사진첩 맨 첫 장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말을 못하십니다."

백주원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고이즈미가 사진을 백주원 방향으로 돌렸다. 백주원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처음 보는 어머니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고이즈미가 백주원의 손을 부여잡았다. 부인도 백주원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백주원보다 더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노부부와 차 한 잔을 마신 후 백주원은 고이즈미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어느 한적한 납골당에 가 어머니의 유골을 확인한 후 발걸음을 돌렸다.

고이즈미는 백주원의 아버지 백상천과 친구였다고 했다. 백주원의 어머니는 이와사키 미데꼬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었다. 그녀는 최상급 게이샤였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 육군성 군기감 우라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그녀가 조선에서 유학 온 무관 백상천의 순수함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고 했다. 그녀는 조선인 무관에게 우라키에게서 얻은 군사 기밀을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둘 사이에 딸이 생겼다고 했다.

군사 기밀이 누출된 것을 안 일본 관헌의 수사망이 백상천에게로 좁혀지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어느 날 밤 허겁지겁 백상천을 찾아와 어린 딸을 맡겼다고 했다. 그녀는 백상천에게 서둘러 귀국하라고 했다.

다음 날 이와사키 미데꼬는 체포되었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백상천과 친구였던 고이즈미도 끌려오게 되었다. 이와사키 미데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모진 고문 끝에 죽은 것을 안 고이즈미는 조선인 친구 백상천의 이름을 댔다. 그리고 풀려난 후 백상천이 한국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버렸다고 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출생과 아버지의 실종을 증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된 백주원은 한바탕 서러움의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의 진정을 찾게 되었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을 공부시킨 후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케 한 신규식의 조치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이 독립 운동가가 된 것을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김태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귀환 길에 올랐다.

백주원이 동경을 떠난 얼마 후,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동경 유학생들은 이미 독립운동의 전통을 축적해 놓고 있던 집단이었다. 그들은 구한말에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를 간행하는 등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했다. 경술년 국권 피탈 후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1912년 학회지 <학지광>을 간행하여 회원들의 조국애를 고취하였다.

그들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조국의 독립 문제를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점도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과 같았다. 그들 역시 1918년 1월에 발표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메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