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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 이삭줍기' 들어보셨나요?

[체험 삶의 현장] 3000평 밭 훑었지만 고작 반 자루

등록|2008.04.20 11:05 수정|2008.04.20 11:05

손질된 황기.어머니가 정선 장터에서 팔 것들이다. ⓒ 강기희


황기 이삭줍기를 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보리 이삭도 아니고 벼 이삭도 아닌 황기도 이삭을 줍는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뭐 먹고 살기 어려울 때야 돈이 되고 밥이 되는 일이라면 가릴 일도 아닌 것이지요.

건천리 가는 길에 만난 진달래꽃...점점홍 점점홍 다가와

그러고보면 요즘이 보릿고개 시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패지도 않은 보리를 바라보며 나물죽으로 연명하던 때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닙니다. 땅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산나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그저께 저녁 정선문화연대 고문인 이도현 선생이 "강 선생, 내일 황기 이삭줍기 갈 티여?"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기 뭔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인 즉슨 황기를 다 캐고 난 밭에서 남은 황기를 벼 이삭 줍 듯 줍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선 오일장에 나가시는 어머니께서 요즘 팔 것도 마땅 찮은 지라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늦은 아침 황기 밭이 있는 건천리(정선군 동면)로 갔습니다. 차로 40여분 걸리는 하늘 아래 첫 동네 마을입니다. 해발 700m가 넘는 곳이라 그 흔한 개나리나 진달래 하나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랫 동네만 해도 산벚꽃을 비롯해 산수유, 목련이 꽃을 피웠지만 아침이면 아직 영하로 떨어지는 건천리에선 어떤 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건천리 가는 길에서 만난 소금강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꽃술을 활짝 연 진달래가 하도 고와서 잠시 한 눈을 팔기도 했습니다. 잠시 진달래를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내 눈은 선홍빛으로 달아 올랐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진달래꽃만 보면 가슴이 후끈 달아 오릅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어떤 여인의 유혹보다도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이 진달래입니다. 점점홍 점점홍 다가오는 진달래꽃을 어쩌지 못할 땐 잠시 까무라 쳐도 좋을 일입니다.

진달래꽃을 보며 아침부터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선홍빛으로 물든 눈을 하니 마치 전날 통음이라도 한 듯 혹은 색광이라도 된 듯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견디기 민망한 아침입니다.

황기밭.이삭줍기를 하기 위해선 너른밭을 다 훑어야 했다. ⓒ 강기희


황기밭 주인은 건천리 농사꾼 김영돈씨입니다. 그는 정선군농민회를 이끌고 있는 농민 투사이기도 합니다. 총선이다 뭐다 서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얼굴 본 지도 꽤 됩니다. 그의 집에 도착하니 오전도 중반을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황기 이삭을 줍기 위해 3000평의 밭을 훑었다

김영돈씨가 직접 만든 민들레즙을 한잔씩 마시고 그간의 적조함을 털어 버립니다. 그의 부인은 새참이라며 라면을 끓여내옵니다. 본격적인 농사철이라 새참은 꼬박꼬박 먹는 답니다. 새벽부터 손품발품 다 팔아야 되는 게 농사일인 터라 새참이 넘기면 밀려오는 허기를 견디기 여렵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먹을 복 있기는 첨이오."

어떤 이는 일 복이 많고, 어떤 이는 먹을 복이 많다지요. 일하는 시간에만 나타나 그 일 마다하지 못하고 소매 걷어 부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먹을 때만 귀신 같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체로 그런 성품은 타고 난다고 하지요. 라면 한 그릇을 두고 먹을 복 타령을 하면서 반주로 담근 술도 한잔씩 곁들입니다.

봄날이 되면 서로 시간을 아껴야 할 때입니다. 새참을 먹은 김영돈씨는 더 머물 시간도 없이 부인과 밭으로, 이도현 선생과 나는 그의 황기밭으로 각자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김영돈씨가 걸음을 멈추더니 한 마디 합니다.

"많이 캐세요."
"쥔이 다 캐고 우릴 부른 건 아냐?"
"하하, 아직 좀 남았을 거래요."

황기밭으로 가니 밭이 크기도 합니다. 족히 3000평은 되어 보입니다. 황기는 이미 캔 상태이고, 밭은 다른 작물을 심기 위해 트렉터로 밭갈이까지 해놓은 후였습니다.

"이 넓은 밭에서 황기를 줍는다고요?"
"이삭줍기라는 게 이런 거여."
"허, 그래도 그렇지. 이건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금반지 찾는 일 같은 걸요."
"엊그제 왔을 때만 해도 황기가 보이더만 오늘은 없긴 하네."

아무려나 먼 길을 달려왔으니 황기를 줍기는 해야 했습니다. 집을 나오면서 어머니께 많이 주워 오겠다고 큰소리까지 쳐 놓았으니 달리 방법도 없습니다. 포대자루를 하나씩 들고 밭을 훑기 시작했습니다. 황기밭 주인이 캔 밭에 마을 아낙들이 또 한 번 훑고 지나간 밭이라 황기가 있을 리 없습니다.

황기 이삭.가뭄에 콩나듯 있는 황기를 줍다. ⓒ 강기희


가끔씩 보이는 황기도 트렉터로 인해 절반씩 동강이 난 것들 뿐입니다. 뿌리가 쭉쭉 잘 빠진 것들이라야 상품가치가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하루 '일당질'은 틀린 듯 싶습니다. 이 선생과 나는 '에라, 팔지 못하면 황기백숙이라도 끓여 먹자'는 심정으로 너른 밭을 갈지자로 오가며 황기를 주워 넣습니다.

황기는 종합한약재, 황기백숙은 집에서 먹는 '보약'

황기는 한약재로 보기약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약한 기를 북돋워 주는 역할을 황기가 담당하는 것이지요.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황기만큼 좋은 한약재도 없다고 합니다. 물론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나 전혀 흘리지 않는 이에게도 좋습니다.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황기차를 끓여 먹어도 되고 황기백숙도 좋습니다. 더위로 지치기 쉬운 여름철 황기는 명약입니다. 삼복더위에 황기백숙을 즐겨 먹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정선에서는 황기를 이용한 음식이 많습니다. 황기족발이 그것이고 황기국수와 황기찐빵 등이 있습니다. 물론 황기백숙은 기본이지요.

정선은 황기의 주산지입니다. 한때는 전국 생산량의 70%가 정선산 황기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전국 어딜가도 판매되는 황기를 '정선산 황기'라고 표기할 정도입니다. 한약상을 하셨던 아버지 덕에 어릴 적부터 황기를 숱하게 보아온 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황기의 효능만큼은 종합한약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티고 사는 것도 어쩌면 황기 기운이 남아 있는 탓일 겁니다.

비료 성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라지 않는 황기는 콩과의 식물로 높은 산자락에서만 재배가 가능할 정도로 성질이 까다롭습니다. 맛은 단 성분이 있으며 <신농본초경>에는 '황기는 독이 없고 아무리 많이 혹은 오래 장복한다 해도 몸이 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황기는 먹을수록 몸이 가벼워지면서 기운이 생기며 노화를 예방하고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황기의 효능이 짐작되시겠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해마다 가장 효과가 좋다는 6년 산 황기 몇 뿌리를 준비해 틈만 나면 황기백숙을 끓여 먹었습니다. 황기백숙은 국물이 보약이므로 큰 솥에 가득 삶아서는 그것을 며칠씩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황기싹.밭갈이로 인해 흙속에 들어있는 황기가 싹을 틔우고 있다. ⓒ 강기희


이삭줍기에 나섰지만 황기 반 자루로 만족해야 해

황기가 6년 정도 되면 산삼보다 좋다고 합니다. 귀한 만큼 비싼값에 거래 됩니다. 어제 이삭줍기한 황기는 3년산이라고 합니다. 보통 황기백숙을 하는 집에서도 2년산 이상은 잘 쓰지 않습니다. 비싼 탓이지요.

뙤약볕을 맞아가며 텅 빈 밭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황기나 많으면 그것을 줍는 재미라도 있건만 그것 또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큰 밭을 절반이나 훑었는데도 자루는 절반도 차지 않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쥔이 다 캔 모양인데요."
"그러게 말여."
"아무래도 쥔 집 황기창고라도 털어야 할까봐요."

어머니께 큰소리를 쳤으니 빈자루를 들고 가긴 영 면이 서지 않았습니다. 김영돈씨에게 전화를 거니 간신히 통화가 되지만 "통화가 되지 않는 곳에 있어요"라는 말만 돌아옵니다. 쥔에게 몇 만원어치 사 가지고 가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왕 한 걸음입니다. 다시 비탈진 밭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줍는 사람.함께간 이 선생이 황기를 줍고 있다. "황기야, 어디있니?" ⓒ 강기희


이삭줍기를 하며 배고픈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밭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이 순간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황기를 주워야만 할 것 같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에겐 황기가 보약보다 소중한 물건입니다. 황기가 밥이 되고 돈이 되는데 그것을 마다하는 것은 배부른 자의 투덜거림에 불과합니다.

나물죽을 먹어본 사람은 압니다. 배고픔과 굶주림의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말입니다. 점심시간 허기를 채우기 위해 수도꼭지를 빨아본 이도 한끼의 식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압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이삭줍기가 힘들지 않습니다.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다리가 아픈 것도 견딜만 합니다.

밭을 다 훑는데 걸린 시간은 세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이삭줍기한 황기를 모으니 반 자루가 조금 넘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습니다. 팔 것은 팔고 먹을 것은 먹으면 됩니다. 버릴 것이 없는 황기라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무겁지 않습니다.

어머니께 황기를 드리니 좋아하십니다. 2만원어치는 된다고 합니다. 아들 노릇 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팔 것과 먹을 것들을 구별해 따로이 묶어 둡니다. 여름이 오기 전 황기백숙을 끓여 어머니께 드려야 겠습니다.

이런. 나만 먹을 생각을 하고 있군요. 올 여름 더위에 지친 벗들 있으면 정선으로 오십시요. 근사한 황기백숙 만들어 대접하겠습니다. 예약은 받지 않습니다. 먼저 오시는 벗들 순서로 몸보신 시켜 드리겠습니다. 늦으면 국물도 없습니다.

황기를 손질하는 어머니쓸 것은 별로 없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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