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동두천시 걸산동
분단과 동족상쟁의 '섬마을'엔 아이가 없다
▲ 양지 바른 언덕에 옹기종기 집을 짓고 평화롭게 산다. 그러나 아기도 어린이도 없다. ⓒ 이의협
가곡 '고향의 봄'은 누구나 즐겨 부른다. 4월 18일, 경기도 동두천시 걸산동을 찾았다. 미군기지 초소를 거치지 못하고, 걸어서 꼬불꼬불 난 험한 임도를 5시간 동안 걸었다. 산과 골짜기의 아름다운 정경에 취해서 힘든 것도 잊었다.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동두천시는 소요산(587m), 국사봉(754m), 왕방산(737m), 해룡산(661m), 천보산(423m), 칠봉산(506m), 마차산(588m), 6개의 산이 시계 방향으로 빙 둘러 쌌다. 이 산의 크고 작은 수 십개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 물이 동두천 시내로 내려서, '동두천'이 되었다. 그래서 시의 명칭이 되었다. 동쪽에 있는 콩알 만한 작은 개천 물이 모이고 합쳐서 냇물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보석같은 산수의 복판, 넓은 골찌기(보산동, 걸산동, 생연동 일부)에 거대한 미군기지가 자리하여 50여년 역사를 이룬 것이다. 골짜기 가장 깊숙히에는 30여 가구에, 100 여명의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 예전에는 '탑개울'이라 불렀고, 지금은 행정동이 보산동에 편입된 '걸산동'이다.
▲ 분단과 동족상쟁이 일지 않았던 '나의 살던 고향'이다 ⓒ 이의협
제 마을에 드나들 때는 미군초소에서 출입증을 제시한다. 거대한 미군기지 장벽에 갇혀 '섬마을'이 된 것이다. 60세가 안 된 남자들은 미군기지에서 경비, 청소, 건설 용역 일도 한단다. 양지바른 언덕에 옹기종기 집을 짓고,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논 농사, 밭 농사도 짓고, 산에서 나물, 약초, 꿀을 재취하여 생계를 이어간다.
마을 언덕에는 1967년 개교, 1999년에 동두천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는 '걸산부교장'의 빈터가 있다. 개교 당시에는 취학 연령의 어린이가 제법 있었는데, 점차 열악한 생활 조건과 교육환경 탓으로 40대 이하의 젊은이들은 다 미군기지 밖으로 빠져 나가고 지금은 아기도 어린이도 한 명 없다.
▲ 조상을 잘 모시는 문중묘역 ⓒ 이의협
'탑개울'이란 옛 이름에 맞게 암자도 몇 있고, 전통 예절을 중시하는 경노당이나 문중묘소, 조상의 '추모재'도 있다. 6·25 전란에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난도 안 갔단다. 가곡 '고향의 봄' 정경이 그대로 느껴져서, 하루 종일 내 고향의 옛날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굿불긋 꽃 대궐,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기도 어린이도 없었다.
소요산까지 전동차가 다닌다. 많은 남녀노소 등산객들이 남쪽 능선 의상대나 공주봉에 오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무심하다. 눈 아래 전개되는 동두천시 42% 넓이의 거대한 미군기지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외세에 의존하여 정신이 마비된 것이 아닌가. 꿀벌 같은 곤충들도 제 종족의 목숨은 저희들이 지킨다. 세계 11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룬 지금, 우리는 언제까지 어린이처럼 형님이나 부모에 의존해서 내 생계를 이어 간단 말인가.
2013년 경에는 저 보석 같은 미군기지 터가 우리에게 이양된다고 한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피는 꽃 대궐 동두천시 걸산동에도 아기가 뛰놀고, 하루 빨리 역사의 새 봄이 찾아 오기를 빈다.
▲ 나물이나 약초를 채취하고 돌아가는 가난한 주민 ⓒ 이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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