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시여?", 멕시코서 튀어나온 '전라도 말'
[자전거 세계일주 70] 멕시코 둘로레스(Dol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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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나후아또 돈키호테 박물관매년 10월이 되면 산 로께 사원(San Roque) 앞에서는 돈키호테를 창조해 낸 '미겔 데 세르반테스'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세르반티노 페스티벌(Festival Internacional Cervantino)이 개최된다. ⓒ 문종성
▲ 성 같은 호텔 멀리서 보면 정말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 문종성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며,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돈키호테 중에서)
삐삘라 기념상에서 과나후아또 전경을 조망하던 내게 저 멀리 한 가지 수상스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럽 중세 시대의 성과 진배없는 고풍스런 자태가 아련하게 보이니 당장 뛰어 달려 가야했다. 어차피 과나후아또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길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 묘한 매력에 이끌리는 건물 때문에 남동쪽 멕시코 시티로 곧장 가려던 것을 과감하게 북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가끔은 불확실한 것에 대책없이 이끌려 가보기도 해야 한다. 거기에 예상 못한 눈부신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석청을 따기 위해서는 절벽을 오르내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듯 멕시코는 그 낡고 아름다운 콜로니얼 도시를 보기 위해선 반드시 산을 넘어야 하는 괴로움을 안고 있다. 대부분이 고도가 높은 분지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빠져나갈 때도 반드시 산을 넘어야 한다. 과나후아또 변방 산 중에 위치한 유적인지 박물관인지 알 수 없는 갈색의 웅대한 성을 가기 위해 센트로를 벗어나는 때도 역시 하루 종일 산만 올라갔다.
▲ 과나후아또 거리 낡고 아름다운 유럽풍의 거리. ⓒ 문종성
그늘 한 점 없는 딱딱한 아스팔트길을 더구나 거의 50도는 기울어진 경사를 오르는 길은 내가 선택한 자전거 여행이라도 후회가 막심이다. 소매로 연신 땀을 닦아내고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를 반복하는 중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렵게 올라간 길. 하지만 이렇게 고생해가며 숨겨진 명소를 찾는 것은 자전거 여행자만이 누리는 특별한 혜택이라며 반색했다.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킨 채 자전거를 밀고 쉬고를 반복하기를 서너 시간. 단지 10km를 전진했을 뿐이지만 나의 마음은 벌써부터 벅찬 흥분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멕시코에서 튀어나온 사투리, "아따 이게 뭐시여?"
"왔구나!"
드디어 베일에 싸여진 건물 앞에 당도했다. 상쾌한 바람으로 땀을 씻고는 차로는 10분이면 오를 산 중턱까지 기진맥진 해가며 올라온 보람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이제 그 건물에 정체를 확인하기만 하는 되는 것이었다. '대관절 무슨 건물이지?' 입구에 'Castillo Santa Cecilia'라는 글자가 보이길래 세실리야라는 인물과 관계된 어떤 곳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마음을 살짝 가라앉히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놀라 허무해진 탄식을 멈출 수 없었다.
▲ 외관에 낚이다서너 시간을 힘들게 올라간 곳이 단지 호텔이라니. ⓒ 문종성
"아따 이게 뭐시여?"
감정이 격해지니 또 사투리 작렬이다. 외관은 완벽한 성의 형태를 띠고 저 멀리에서 보기에도 심상찮은 기운이 있어 몇 시간 고생해서 올라온 곳이 유적지도 박물관도 아닌 바로 호텔이라니! '세실리야'는 그저 성 아니 호텔의 이름일 뿐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낯선 것에 호기심이 가득한 상태에서 그만 화려한 외관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철퍼덕. 낚였다고 생각하니 그만 온 힘이 다 빠져버렸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거리를 힘들게 와 버렸다. 문득 편하게 갈 수도 있는데 왜 시간 들고 돈 드는 이런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는지 씁쓸함에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그래도 인생은 미적완성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감동을 위한 훌륭한 수업이라 생각하고는 햇살에 데워진 뜨듯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몇 방울의 물이 입가를 타고 가슴에 흘러내리면 땀인지 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숨 한 번 몰아쉬고는 이왕지사 이리 된 거 다음 도시인 돌로레스를 향해 또 험한 산으로 달려 들어가기로 했다.
한국에 김구가 있다면 멕시코엔 '이달고'가 있다
▲ 돌로레스 가는 길멕시코 콜로니얼 도시로 들어오거나 빠져나갈 때는 항상 산을 넘어야 한다.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치명적이다. ⓒ 문종성
이달고는 멕시코에서 우리의 김구 선생과도 같이 추앙받는 독립영웅이다. 그는 스페인 식민정부에 대항한 비밀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이 계획이 탄로 나자 즉각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을 무장시킨 뒤 정부에 저항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연설을 할 때 "과달루페의 성모(인디언 신앙의 상징)여, 영원하라. 나쁜 정부와 가추피네스('말에 박차를 가하는 놈들'이라는 스페인어)에게 죽음을!" 하고 외쳤다.
이달고의 이 외침은 독립운동의 표어가 되었고 멕시코 독립기념일인 9월 16일에는 언제나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화국 대통령이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이 구호를 외친다고 한다. 1810년, 멕시코가 독립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을 했을 때 질렀던 함성이 바로 '돌로레스의 외침(Grito de Dolores)'인 것이다.
사실 돌로레스는 어떠한 관광자원이나 문화적인 관심 포인트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단지 이 돌로레스에서 그 때 그 사력을 다한 이달고라는 한 남자의 외침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비명횡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수많은 희생자들의 도전과 절규,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서 멕시코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그 열렬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 당나귀마치 로시난테를 보는 듯. 등에 걸친 짐이 무거워 보인다. ⓒ 문종성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변화를 갈망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전제된다. 하나는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불굴의 신념과 다른 하나는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지배적 야망이 그것이다. 때로 그 두 가지가 모두 혼합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런데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지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전박적인 개혁이 불가피하다.
때론 거저 얻는 이득이나 편한 방법으로 살아 온 황금처럼 보이는 독소적인 습관을 버려할 때가 있다. 정말 소신에 가득 찬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때론 재산이나 친구, 명예나 지위 등도 과감히 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리라. 거창하거나 혹은 실없는 소리겠지만 내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고민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내 그릇은 한없이 옹졸한데 반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실로 벅찬 것이라서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로 마음 쓰는 것이다.
돌로레스에서 자전거 여행의 묘미에 빠지다
▲ 절벽 위의 집 풍경이 아름답긴 한데. 산 중에 홀로 지어진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집. ⓒ 문종성
결국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이치를 몰라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번민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생각에만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돌로레스의 외침은 3.1 만세 운동이나 역사의 터닝 포인트를 찍었던 세계의 여러 독립 외침과 적지 않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그들의 가장 큰 가치는 믿고 있는 올바른 생각을 행동으로 과감하게 옮겼다는 것이다. 내가 믿고 있는 생각을 옮기기까지 난 또 많은 것을 길 위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이 그것을 거저 준 게 아니라 내 올바른 신념이 세상에 휘둘리거나 남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실현될 때라는 걸 기억해 두려 한다. 돌로레스에서 이런 감상에 빠진 것도 자전거 여행의 묘미가 아닐런지.
저녁 즈음에 도착한 돌로레스에서는 임팩트가 컸던 역사적 현장에 비해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때 그 뜨거웠던 역사의 현장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심장은 뜨거웠으리라. 지금은 돌로레스 카떼드랄의 화려한 조명만이 2세기 전 분기탱천했던 정의의 기억을 비추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내게도 나만을 위한 돌로레스가 어딘가 반드시 존재할 거라고. 굳이 이곳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게 어디인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지금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세실리야 성을 빙자(?)한 호텔 덕에 돌로레스까지 와서 이런 사념에 젖어든다는 건 그리 손해 볼 일이 아니라는 게 나의 여행철학이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기쁨에 배고픈 철학보다 샤워와 저녁 만찬만 있으면 되므로.
▲ 독립 역사 현장의 중심 황금처럼 빛나는 돌로레스 카떼드랄.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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