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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어코 행복을 성적순으로 매길 건가요?

학교자율화 정책, 과거의 모습이 미래의 모습 될 수도

등록|2008.04.23 14:54 수정|2008.04.23 17:11
# 장면 하나. '성적 연좌제'에 매맞고 자퇴한 친구

저녁 식사를 마친 오후 7시, 모든 친구들이 교실 스피커에 귀를 기울인 채 아연 긴장했습니다. "각 반 ○조 ○번, 필기도구를 챙겨서 시험장으로 내려올 것!" 순간 교실에서는 환호성과 탄식이 교차하고, 반마다 한 명씩 지정된 '운 없는' 아이는 같은 반 친구들 전체의 '운명'을 떠안은 채 시험장을 향하게 됩니다.

반마다 성적을 기준으로 조가 나누어지고 조 안에서도 성적순으로 1번부터 8번까지 번호를 부여받게 돼, 몇 반 몇 번인가 하는 것보다 몇 조 몇 번인가가 아이들에게 훨씬 더 익숙한 '고유' 번호가 됩니다. 같은 번호를 지닌 친구들끼리 날마다 시험을 치르게 해 우열을 가리게 하고, 채점 결과 꼴찌를 한 아이가 속한 반은 일요일에 등교하는 등의 벌칙을 받습니다.

한 번은 우리 반 한 아이가 두 번이나 '재수없게' 걸리더니 두 번 다 꼴찌를 해서 친구들에게 뭇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틀 속에서는 누군가는 꼴찌를 할 수밖에 없고, 어느 반이든 벌칙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도 친구들은 다짜고짜 그 아이를 탓했습니다. 이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얼마 안 있어 그 아이는 자퇴를 선택했습니다.

한 아이의 성적을 가지고 반 전체에 벌을 주는 '연대 책임'도 그렇지만, 매일 저녁 '내가 걸리면 안 되는데' 하며 떨어야 하는 극도의 긴장감은 저녁밥조차 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구 한 명의 예외 없이 공부에 몰입하게 만드는 이런 방법을 두고, 아이들이 경쟁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이 마치 벌이 윙윙거리는 모습 같다는 뜻으로 '버즈(Buzz) 학습'이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단기간에 점수를 크게 올리는 데에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던 터라, 이를 처음 고안한 분은 퇴직 후에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며 각 학교에 '비법' 전수에 열을 올렸다는 풍문이 한창 떠돌아다녔습니다.

▲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고등학생을 다뤄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사진은 영화 주인공 은주가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모습. ⓒ


# 장면 둘. 아무도 '블랙리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물론, 월초고사와 월말고사가 있었고, 국영수 같은 중요 과목은 주초고사와 주말고사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1년 365일, 하루가 멀다 하고 시험만 치렀던 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점수를 올리는 데에는 수업 열 번이 시험 한 번에 미치지 못하는 법입니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가 나오면 석차를 공개했습니다. 전지에 검정 매직펜으로 써서 복도 한 쪽에 붙였는데, 1등부터 100등까지의 우등생 명단과 꼴찌부터 100명까지의 열등생 명단(이를 '블랙리스트'라 불렀습니다)을 대조할 수 있도록 다음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란히 걸어두었습니다. 시험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취지였습니다.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였던 까닭에 꼴찌라 해도 나름대로 '잘 나가는'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순간 선생님들은 물론, 친구들에게조차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뼈아픈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와신상담 노력하여 그 깊은 수렁에서 벗어났다는 친구들 얘기는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퇴학도 많고, 자퇴도 흔했으며, 드물긴 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대개 연이은 시험과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못 이긴 경우입니다. 교실에 빈 책상이 하나둘 늘어나도, 선생님은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며 한눈 팔 때가 아니라고 다그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 볼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 장면 셋.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도시락 3개 가지러

학교에 급식소가 따로 없었기에 모두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교실은 공부하는 곳이자 밥을 먹는 식당이기도 했습니다. 학급당 학생 수가 60명이 훌쩍 넘었고,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짓궂은 친구들이 있어서 수업 시작 몇 분 동안은 교실을 환기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등교 시간이 오전 7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밤 10시, '소수 정예'의 특별반은 자정이 돼서야 끝나는 빡빡한 생활 속에서 도시락은 모두 세 개씩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하루 세 끼를 모두 학교에서 해결해야 했고,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웃지 못할 유행어도 그 즈음 생겨난 것입니다.

보온도시락을 세 개나 챙길 형편이 안 되는 많은 아이들에게 겨울철은 식사 시간마저 즐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찬밥'을 먹어야 했던 아이들보다 도시락을 세 개씩이나 준비해야 했던 부모들의 고통은 훨씬 더 컸습니다. 고등학생을 두 명 둔 경우는 아예 도시락 챙기느라 아침이 부모에게는 '뼛골 빠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자녀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었던 '극성' 부모들은 식사 시간에 맞춰 학교를 찾아가야 했고, 교문에서 도시락을 사이에 둔 자녀와의 짧은 만남이 교도소 면회하듯 이뤄졌습니다.

오로지 자녀가 명문대에 갈 수만 있다면 자신과 다른 가족들의 그런 고통쯤은 너끈히 이겨낼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명문대 입학과 (죽지 않을 만큼의) 매질을 맞바꿀 수 있다는 얘기도 부모들의 입을 통해 심심찮게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 급식이 없던 시절, 학생들은 도시락을 3개씩 싸가지고 다녀야 했다. 사진은 지난 2006년 식중독 사고 여파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 학생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장면 넷.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못하고

지역민들의 투표를 통해 비평준화 정책이 해제되던 날, 몽니 부리듯 '이제 우리 지역은 죽었다'며 한숨 내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른바 지역 명문고 출신들은 지금부터 입학하는 아이들은 자기 후배들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인재들이 배출되지 않으면 누가 지역을 살리겠느냐며 항변하는 그들은 기실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유지'들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실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평준화 정책이 지역을 망쳤다며 '원상복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문에 명문대 합격생 이름과 수를 적은 현수막 내걸리는 모습 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 그들은 정작 지역이 배출한 명문대 출신자들의 추후 행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박수갈채 받으며 서울로 간 그들이 지역에 다시 내려왔다는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듣질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역(을 위한) 인재'가 아니라 '서울(을 위한) 인재'일 뿐인데 말입니다.

기실 지역에 남은 자신들은 지금껏 명문고 출신임을 내세워 행세깨나 해왔습니다. 지방의 중소 도시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그 지역 명문고 출신이 아니면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고, 지금까지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평준화는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빼가는 것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앞의 세 장면은 꼭 20년 전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벌어졌던 일이고, 마지막 장면은 이태 전 고향을 찾았을 때 보았던 것을 소략한 겁니다. 그 흔한 영화 한 편 볼 수 없고, 제대로 된 책 한 권 읽을 수 없었던 '처절했던' 그 때가 요즘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곳곳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업에 의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쉬쉬하며 묻는 모습에서, 20년 전 '다수를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한 교사의 일갈이 정확히 겹쳐집니다.

일제고사를 치르고 성적을 공개해서 학생, 학교 간 경쟁심을 북돋워야만 교육이 살아날 것처럼 이야기하는 새 정부와 교육 관료의 방침은, 20년 전 저녁 시간 모든 아이들의 피를 마르게 했던 '버즈 학습'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명색이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이런 상황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교육에 관한 한 과거로의 완벽한 회귀이자 역사의 퇴행이 맞긴 한데,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는 명제가 거짓이 될 처지인 까닭입니다. 어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꼼수' 같지만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밥도 못 먹게 하고, 잠도 못 자게 할 게 뻔한 최근의 교육 정책이 어떻든 시행될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이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 믿는다."

▲ 공교육 포기·무한 입시경쟁 조장하는 '학교자율화 계획' 철회를 위한 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2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범국민교육연대,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민주노총, 진보신당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덧붙이는 글 20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정리하고 있을 무렵, 신문을 들춰보니 얼마 전 여론의 철퇴를 맞은 '24시간 학원영업시간 제한규정' 철폐를 서울시의회가 재시도(?)한다는 뉴스가 실렸더군요. 교육 당국은 물론, 시의회까지 나서서 아이들을 못 괴롭혀 안달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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