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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풍산 홍씨의 세도, 결정적 하자 있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등록|2008.04.24 12:59 수정|2008.04.24 15:37

▲ 홍국영의 세도는 막강했다. 드라마 <이산>. ⓒ MBC


완풍군(完豊君).

'전주(完) 이씨와 풍산(豊) 홍씨는 동격이다.' 그런 노골적인 군호를 여동생의 양자인 이담에게 부여한 홍국영. 그는 단순한 '실세'가 아닌 '세도가'였다. 세도가 홍국영은 '저 높은 정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홍국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실패한 것은 단순히 그가 전횡을 일삼고 무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실패한 것은 단순히 정조 임금이 그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만도 아니다. 거기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중국 전국시대(진시황제 이전)의 유명한 고사가 하나 있다. 이 사례를 통해 홍국영의 세도가 처음부터 어떤 결정적 하자를 안고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도가 홍국영의 결정적 하자

때는 초나라 선왕의 재위기(BC 369~BC 340년). 초나라의 국력이 강성하여 다른 제후국들이 초나라를 두려워하던 때였다. 다른 제후국들은 초나라 사령관인 소해휼을 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해휼은 당시의 명장이었다.

'초선왕-소해휼'과 '정조-홍국영'의 사례가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초선왕 및 소해휼을 각각 정조 및 홍국영과 등치시켜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초나라가 막강하므로 마땅히 선왕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 터인데도 신하인 소해휼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선왕 입장에서는 그것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또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국책> '초책'에 의하면 선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하문했다.

"내가 듣기로 북방에서 소해휼을 두려워한다는군요. 정말로 그렇습니까(吾聞北方之畏昭奚恤也果誠何如)?"

참고로, 여기서 '북방'이란 당시 중원 각지에 존재한 제후국들을 가리킨다.

이같은 왕의 하문을 받고 대신들이 좀 난감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들으면 그냥 단순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왕 자신이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런 고사가 나올 때마다 꼭 등장하는 설정이 하나 있다. 군주의 하문을 받고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요한 침묵을 깨고 누군가는 꼭 대답을 하기 마련이다. 위나라 출신 초나라 관리인 강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북방 제후국들이 정말로 나의 신하 소해휼을 두려워하느냐'라는 이 난감한 질문에 대해 강을이 제시한 답변은 그 유명한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이야기였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백수의 두려움을 받았다는 이 이야기는 남의 권력을 빌려 위세를 부림을 비유할 때에 사용되고 있다.

이산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홍국영

백수가 여우 앞에서 벌벌 떤 것은 실제로는 여우 뒤에 서있는 호랑이 때문이었다는 내용의 비유를 선왕에게 설명한 뒤에, 강을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왕의 땅은 사방 5000리이고 백만 명을 대갑(중무장)시켰으며 그것을 전적으로 소해휼에게 맡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방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로는 왕의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故北方之畏奚恤也其實畏王之甲兵也). 마치 백수가 (실제로는) 호랑이를 두려워함과 같은 것이지요."

참고로, 여기서 '대갑'은 원칙상 '중무장 병사'를 가리키는 명사이지만, 문맥상 동사로도 풀이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동사로 번역했음을 밝힌다. 고대 한문에서는 이런 경우가 자주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을의 말에 따르면 당시 초나라는 사방 5000리의 영토와 백만의 중무장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제후국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될 만 했다. 그러므로 마땅히 초나라 왕이 국제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도 엉뚱하게 신하인 소해휼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소해휼에게 군권이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강을의 답변이었다.

강을의 말을 다시 정리하면, 소해휼의 명성은 그리 견고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초나라 왕의 신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해휼은 결코 독자적 기반 위에서 국제적 명성을 쌓은 게 아니었다. 그의 명성은 결국에는 초나라 왕의 명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나라 왕이 기회를 봐서 신임을 거두는 순간, 소해휼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가 여우 곁을 떠나는 순간, 여우보다 힘센 짐승들이 여우에게 달려들 게 뻔하듯이 말이다.

▲ 풍산 홍씨의 세도는 결국에는 전주 이씨의 왕업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이산>. ⓒ MBC



호랑이 곁을 떠난 여우의 몰락

위와 같은 전국시대 초선왕과 소해휼의 고사를 통해 홍국영 세도의 본질이 보다 더 명확해질 것이다. 홍국영 자신은 풍산 홍씨의 세력확대를 위해 세도정치를 펼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주 이씨의 왕업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홍국영이 새로운 명분, 새로운 정통성을 창출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지 못하는 한, 풍산 홍씨의 세도는 결국에는 전주 이씨의 왕업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주 이씨의 입장에서는 풍산 홍씨가 자신들의 왕업을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기회를 봐서 풍산 홍씨에 대한 신임을 철회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홍국영이 실세 정치가로서 적당한 선에서 만족했더라면 오히려 그것이 자기 자신한테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냥 실세로 만족했다면 정조 임금이 그를 실각시킬 명분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국영은 그 선을 한참 넘어가고 말았다.

지하철에 탑승한 홍국영은 자신이 '옆사람' 휴대폰을 빌려 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통화에만 몰두한 나머지 '내 손에 있으니 내 핸드폰이려니' 하고 여러 통의 국제전화를 마구 걸다가 옆사람에게 따귀를 맞고 핸드폰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다면, 왕건이나 이성계 혹은 전봉준처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어떤 독자적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홍국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편리한 방법으로 자기 세상을 열고자 한 것이다.

▲ 전주 이씨 왕업의 중심인 경복궁 근정전. 풍산 홍씨의 세도는 전주 이씨의 왕업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 김종성



전주 이씨의 왕업 위에 풍산 홍씨의 세도를 건설하려 한 홍국영. 홍국영의 세도는 그래서 처음부터 결정적 하자를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가 '여우' 곁을 떠나는 순간 백수들은 여우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다. 홍국영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철회되는 순간 정치세력들은 홍국영에 대한 파상공세를 개시했다.  

동아시아에서 찾기 힘든 500년 왕업을 유지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전주 이씨는 홍국영이 만만히 볼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한 왕조가 아니었다. 자기 왕업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선왕조는 홍국영 같은 야심가에게 무한정 너그러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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