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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역사팩션 52] <동방견문록>은 기행문이 아니다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2008.04.26 18:47 수정|2008.05.26 10:30
이야기를 듣는 신명호는 꿈을 꾸는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국내에서 상해로 향할 때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것은 대체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거친 삶과 무딘 감성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국내의 사람들보다 더 꿈에 젖어 있었고 낭만과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그들은 친절할 뿐 아니라 유머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착한 심성과 매력적인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과 민필호의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문학과 예술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신명호에게 김태수는 조선의 건축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민제호는 인상부터가 비범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매력을 느낀 사람은 백주원이었다. 백주원은 동서양의 교양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술과 차를 마시며 밤이 깊어 가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민필호가 말했다.

“우리 태수 형 단소를 한 번 들읍시다.”

달빛이 창문의 문풍지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이 촛불을 다 끄자 달빛이 방 안에 더 환히 들어찼다. 백주원이 아예 방문을 열어 버렸다. 서늘한 산 공기가 달빛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침을 삼키며 김태수의 연주를 기다렸다.

김태수는 융단 주머니에서 오죽 단소를 천천히 꺼냈다. 그러더니 그는 가부좌를 틀고 단정히 앉았다. 그는 단소에 몇 번 숨을 불어 넣더니 입술을 뗐다. 그러고는 신명호를 보며 말했다.

“우리 제수씨를 위해 침사상량(沈思商量)을 연주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단아한 자세로 앉았다. 그가 지그시 눈을 감자 여리고 영롱한 죽음(竹音)이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연주는 몇 번 느리고 빠르기를 반복하더니 별안간 사나운 여울처럼 휘몰아쳤다. 음공을 누르는 김태수의 손가락이 조금 바빠지는가 했는데 어느새 연주는 정밀한 소리로 가라앉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소리는 이따금씩 청아한 고음으로 뒤틀리듯이 솟구쳤다. 김태수는 온몸에 소리를 싣고 있었다. 그의 눈자위에 미세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소리와 달빛과 냉기가 마치 제4의 감각으로 승화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단소 연주를 듣고 있었다. 민필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신명호는 단소 끝을 보고 있었다. 민제호는 천정을 보고 있었고 백주원은 바닥에 눈을 주고 있었다. 바닥을 짚은 백주원의 손등에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지면서 김태수의 연주는 끝이 났다.

며칠 후 그들은 온주(윈저우)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하루 묵고 맡긴 말을 찾아 항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기후가 온화하다고 해서 온주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도시는 절강성의 남부에 있었다. 온주 주변은 거의 모두가 감귤 밭이었다. 그리고 감귤 밭 사이사이 무너진 성벽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감귤 밭에 가서 국내와 상해에서는 보기 힘든 귤을 많이 사 먹었다. 싱싱한 데다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그들은 바닷가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다섯 사람이 다시 한 방에 모여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온주는 바다 비단길이 시작되는 중국 남동 해안의 요지에 있는 항구 도시였다. 비단길이 없었더라면 동서양의 교류도 어려웠을 터라고 민제호가 말했다.

보통 비단길은 세 종류의 루트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먼저 초원 비단길이 있었다. 스텝로드(steppe road)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동아시아 북부의 초원 지대를 통과하는 동서양의 루트였다. 주로 유목민들에 의해 개척된 이 길은 육상 교역을 통해 동서양이 서로 문화를 주고받았던 고대의 비단길이었다.

다음으로는 오아시스 루트가 있었다. 중앙아시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의 오아시스를 연결한다고 해서 오아시스 비단길이라고 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실크로드가 바로 이 길이었다. 세 개의 비단길 가운데 이 길이 유달리 유명했던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때문이었다. 우리가 흔히 기행문이라고 오인하고 있는 동방견문록은 사실상 기행문도 아니고 견문록도 아니라고 민제호는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지리서나 박물지 또는 풍습 보고서로 보는 게 옳다는 것이었다.

역시 민제호는 언제나 독자적인 논리와 결론을 확고히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민제호의 말에 따르면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오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원 제목부터가, ‘디스크립션 오브 더 월드’ ‘즉 세계에 관한 서술’임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태리 상인의 아들인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구술했다는 동방견문록은 동양에서 보물을 얻고자 하는 서양인들의 물욕과 맞물려 세계적인 저작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즉 13세기의 유럽의 대중에게 알려진 중국은 비단과 향료의 지대였어요. 생생한 경험담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믿을 것 아니겠습니까?“

마르코 폴로가 원 세조(징기스칸)의 총애를 받으며 꽤 높은 벼슬까지 했다는 것은 유럽 사람들의 주장일 뿐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없다고 민제호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가 황제의 칙사였다면 더더구나 기록에 있어야 할 법이었다. 그리고 그가 중국을 실제 답사했다면, 답사 중 최소한 두 번은 넘었어야 할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민제호는 말했다.

마르코 폴로는 10년 이상 중국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그가 당시 크게 발달했던 인쇄술이나 서적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한 것으로 보아 그의 경험을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그는 소인배 장사치여서 그런 문화나 유적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가 서양에 전한 것은 밀가루 면발 하나는 확실하다고 민제호는 말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밀가루를 부풀려서만 먹었지 반죽해서 국수로 만들어 먹지 못했다는 거였다.

“이태리의 요리 중에 스파게티란 게 있어요. 그거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자장면을 보고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자장면에서, ‘자’는 튀긴다, ‘장’은 된장을 뜻하잖습니까? 그러니 스파게티는 서양 자장면인 셈이지요.”

문제는 동방견문록의 파급력에 있었다. 이 책의 영향으로 콜럼버스라는 약탈자가 아메리카 대륙에 간 것이고, 이후에도 동방견문록은 서양인들의 목적과 의도에 부합되도록 수없이 윤색, 첨삭되어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탐욕을 끊임없이 부추겨 왔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했어야 할 책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동양이 무조건 신비하다고 말하는 무선동의 선동서들 말입니다. 같은 논리로 말한다면 요즈음 동양인에 대한 온정주의, 동양인을 지원하는 서양인들, 동양인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들, 이들이야말로 미상불 보이지 않는 적들입니다.”

세 번째 비단길인 바닷길은 다섯의 조선 젊은이들이 머무는 중국 남동해안에서 시작하는 루트였다. 한국의 경주, 개경, 서경과 연결되는 중국의 항주, 영파, 온주, 광주의 무역선들은 베트남의 호이안과 밀라카 왕국을 통과하여 인도의 마드라스, 콜롬보, 그리고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와 홍해 연안의 아덴과 제다를 지나 알렉산드리아 베네치아, 포르투갈까지 항해했다.

세 비단길 중에서 바닷길은 동·서 상호 교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서양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바닷길은 제국주의 침략의 정통 코스로 바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과 갈등도 많았지만 선진 문화를 전래해 주는 중국에 대하여 대체로 은의를 입고 있다고 여겨 왔다. 하지만 은의에는 양날이 있게 마련이었다. 일본과 서양은 그 은의를 다른 날로 갚은 대표적인 경우에 속했다.

인류 역사에서 분명한 것은, 이민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동양과 서양은 질적으로 격차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서양이 항해술이 앞서서 동양을 정벌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허구에 불과했다. 낙타 한 마리는 270킬로그램의 물품을 등에 지고 사막과 초원을 타박타박 걸어야 했지만, 이미 8세기 후반 중국의 300톤 급 다우선 한 척은 600마리 분의 낙타 등짐과 550명의 선원을 함께 실어 나를 수가 있었다. 요컨대 당대의 송과 원은 벌써 초유의 해상 강국을 이뤄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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