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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서러워 피-ㄹ 늴리리

[북한강 이야기 288] 패는 보리이삭에 묻어나는 향수

등록|2008.04.27 12:13 수정|2008.04.27 12:13
보리밭 향수가 그립고 보리냄새가 맡고 싶어 작정 없이 남도로 내려갔다. 고창으로 갈까하다 주말이라 북적댈 것 같아 자꾸만 가다보니 보성 득량만, 어느새 남도 끝이다. 득량면 감골 마을은 가난한 방랑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온 마을이 유채꽃, 자운영, 보리밭 세상이다. 노랑, 분홍, 초록 물결이 한데 어울려 전원교향곡을 연주하고, 색들이 어울려 끝 간 데 없이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비릿한 해풍이 밀려올 때마다 청 보리밭과 하늘 사이엔 보리 내움과 흙냄새가 콧속을 간질이고, 들판과 하늘이 맞닿아 지평선이 열리고 있다.

▲ 초록빛 보리밭과 파란하늘이 끝간데 없이 맞닿아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남도 보성군 득량만 마을 ⓒ 윤희경


호젓한 보리밭 사이길, 둘러봐야 사람 하나 볼 수 없고 한참 속속 알이 차오르는 보리밭에 바람이 일렁이면 넘실넘실 녹색바다가 된다. 그러나 어인 일일까. 금세 잡념이 사라지고 눈이 시원해 오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정신 사납게 어질거린다.

‘보리밭….’ ‘보리피리’하면 향수와 낭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보릿고개’하면 시리고 서러운 한의 덩어리가 밀려온다. 보리죽, 보리개떡하면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배고픔의 극치를 나타낸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는 버림받은 불쌍한 존재이고, 쑥맥(보리와 콩)하면 미련한 곰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 보리밭에 해풍이 밀려와 춤을 출 때마다 보리내움이 콧속을 간질이고... ⓒ 윤희경


며느리가 진통하는 산실(産室) 앞에서 시어머니가 ‘고추냐, 보리냐’ 물으면 성별이 알고 싶어 안달 나 부르는 소리다. 보리는 보지 않아도 여성을 뜻한다. 옛 며느리들은 보리가 태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부터 보리밭을 설설 기며 보리죽만 먹어야 했다. 오늘날도 그 놈의 고추가 뭔지 보리 딸을 연속으로 쏟아 낳은 여인들의 심사가 그리 가볍지 않은 것을 보면 보리는 예나 지금이나 한의 덩어리인 셈이다.

하지만, 보리가 꼭 부정적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리는 피부와 안색을 곱고 매끄럽게 하며, 피를 맑게 걸러내 독기를 없애주고, 혈맥을 푸른 피로 바꾸어 풍기(風氣)를 막는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 보리가 콜레스테롤을 없애준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릿고개’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시기를 말하고, 보릿고개를 넘기는 동안을 ‘보릿동’이라 한다.

그러나 옛날을 돌아볼 필요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농민들에게 이 시대는 ‘보릿고개’이고 ‘보릿동’이 틀림없다. 물가가 밤만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치솟고, 소 값은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을 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입만 열면 ‘억..억’하며 백성들의 기를 죽이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 보리이삭과 유채꽃, 상생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 윤희경


보리가 한참 익어가고 있다. 초록이 지천으로 넘실대는 보리밭을 거닐다 보니 그 옛날처럼 보리피리가 불어보고 싶다. 보릿대를 꺾어 적당히 잘라 손톱으로 작은 구멍을 내 불면 피-ㄹ 늴리리 소리가 난다. 피-ㄹ 늴리리 소리는 분명 고향의 소리고 향수의 메아리다. 창끝처럼 패는 보리 이삭이 농민들의 검붉은 살점을 달고 있어 그 소리가 한층 서럽고 애달프게 심장을 쥐어뜯는다.

소 값 더 떨어지기 전에 암소 팔러 장에 간 줄도 모르고
어미 찾는 송아지 울음소리 서러워 ‘피-ㄹ 늴리리’

깜부기(까맣게 된 보리 이삭) 신세 돼 속상하는 농부가 안타까워 ‘피-ㄹ 늴리리’

▲ 깜부기, 요즘 농부들은 깜북이가 되어 보릿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 윤희경


보리밭에 해풍이 밀려와 초록바다가 출렁일 때마다 서러움이 자꾸만 북바쳐 오른다. 이 서러운 ‘보릿고개’로 이번 여름을 어떻게 보낼까. 언제까지 보릿고개 신세 한탄만 할 것인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과 농촌공사 전원생활 포털사이즈, 북집 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클릭하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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