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 많던 '진보논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역언론 별곡 224] 진보매체들이 우려하는 '고개숙인 진보'

등록|2008.04.28 09:33 수정|2008.04.28 14:48
'보수화된 20대'
'강렬한 보수회귀'
'쓰나미급 보수회귀'

미디어 활자와 영상에 묻어나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온통 보수로 채색되어 있는 듯하다. 반면, 두번의 선거를 치르고 난 우리 사회는 '진보 위기론'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화려한 보수의 재구성 앞에 진보는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살피는 형국이다. 참으로 초라하다.

누가 이토록 진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는가. 진보는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상황이 돼가고 말 것인가.

그 많던 진보논객들조차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한때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타고난 부지런함과 진중한 역사의식에 기반해 예리한 통찰력을 과시했던 그 많던 진보논객들조차도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 논객들도 있다.

진중권 "활동하는 진보논객이 거의 없다"

▲ 시사평론가 진중권씨(자료사진). ⓒ 권우성

투쟁적 진보논객으로 잘 알려진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마저 '활동하는 진보논객'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전공을 찾아 나섰다. 그의 전공인 미학으로 돌아와 최근 새 책 <서양미술사Ⅰ>을 냈다. 2004년 인문분야의 스테디셀러인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 3권을 완간하고 2005년 2월 아내와 함께 <성의 미학>을 발간한 뒤 약 3년 만이다.

진 교수는 지난 1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활동하는 진보논객이 거의 없다"며 현 상황에서 자신의 논객 활동은 불가피하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는 이에 앞선 지난 11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총선 민심을 "국민들이 '아예 우측 깜빡이을 켜고 우회전하자' 이렇게 가버린 것"이라고 비유해 주목을 끌었다.

진 교수는 이날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백운기입니다>에 출연, "한나라당에서 계속 (민주당을 가리켜) '좌파정권' '좌파정권' 하면서 그 착시를 부추긴 것"이라며 "한나라당은 민주 대 독재의 패러다임이 낡은 것이 되자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민적 욕구가 생겼는데 그 틈을 파고 들어온 것"이라고 평했다.

보수 성향 당선자 수가 200석이 넘었다는 데 대해선 그는 "지금은 대한민국 공화국을 이씨 왕조로 개헌을 해도 될 상황"이라며 "의료 민영화 등 공공부분의 축소가 가장 걱정된다"고 밝혔다.

조갑제 "한국의 좌파적 진보는 이제 마지막"

대표적 보수논객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어두운 진보진영의 맥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18대 총선을 "보수의 승리라는 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대한민국과 헌법 체계의 승리고,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우려는 했지만 혀를 내두를 정도다. '순간 포착'이 예리하다.

조씨는 지난 15일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백운기입니다>에 출연, 이번 총선에서 국민 지지가 보수로 몰린 이유를 "지난 10년 동안 좌파적 정권 하에서 진보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국민이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다음에 중요한 변화가 사회의 노령화·고령화다, 그래서 여론의 보수화와 연령구조의 고령화가 겹쳐졌다"고 설명했다.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어 그는 "구조적으로 한국에서 좌파적 진보는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며 "지난 대통령 선거 때 50세 이상이 전체 투표자의 40%를 차지했는데 이번 총선에서는 그것보다 조금 높았을 거다, 연세 드신 분들은 아마도 보수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진보는 이제 다 죽었다는 뜻과도 같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백가쟁명은 아닐지라도 화려한 내공을 자랑하던 진보논객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춤추는 보수를 넋놓고 바라만 보고 있으니 말이다.

정치나 제도권에 너무 발을 깊숙이 담가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수려하고 깊던 통찰력까지 잃어버렸을까. 아무리 진보의 길이 고달프고 험하다고 하지만 진보담론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진보담론·진보논객을 찾는 네티즌들이 눈에 띈다. 사이트 조회 수에서 나타난다.   

<시사IN> "진보의 재구성을 명하노라"

우리 사회의 보수 비만증과 진보적 냉소주의를 우려하는 진보매체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절대 진보는 죽지 않는다'고 애써 강조하고 있지만, 불안한 기색은 지울 수가 없다. 반성과 성찰을 전제한 '진보의 재구성'을 이구동성으로 주문하고 있지만 논리는 그리 강건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울과 지방의 소수 진보매체들의 '진보 구하기'는 눈물겨울 정도다. 진보논객들의 간헐적인 뒷받침도 주목을 끌 만 하다. 먼저 <시사IN> 31호 커버 특집 기사는 주목할 만하다. 거대 보수의 시대, 진보의 운명을 진단한 기사다.

<시사IN>은 "복수는 유권자 힘 '민주화' 종치고 '진보의 재구성'을 명하노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진보의 재구성이 관건'이라고 해답을 내렸다. "반복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 내면 진보고, 반복에 그치면 퇴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고 기사를 쓴 박형숙 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반성과 성찰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도 내포됐다.

"김영삼은 외환위기를 불러왔고, 김대중은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으며, 노무현은 이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재분배가 안 된다는 불신만 갖게 되었다"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말을 인용한 점은 더욱 깊은 반성과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읽힌다. 

그러면서도 이 기사는 역사의 반복에 초점을 맞춘 점이 독특하다. "20년 전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민주화 세력,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다면 1988년의 여소야대가 1990년의 3당 합당으로 뒤집어진 역사의 반복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며 "관건은 진보의 재구성"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강준만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할 장애는 진보적 냉소주의"

▲ 강준만 전북대 교수(자료사진). ⓒ 인물과 사상

이같은 과거의 성찰과 반성의 주문은 <인물과 사상> 4월호에서도 묻어난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가 모른 척 할 리 없다. '원조(元祖) 콤플렉스: '민중의 나라'와 '엘리트의 나라''란 제목의 칼럼에서 2004년 총선 이후부터 참여정권을 조곤조곤 비판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었을 때에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개혁 세력이 의회권력을 교체했다'며 감격하기만 했지, 이후 프로그램은 빈약했고 추진방식은 엉망이었다"는 그는 "'참여정부'라는 딱지가 내세운 '참여'는 대표성과 균형을 상실한 채 골수 마니아 지지자들만의 참여로 전락함으로써 오히려 대(對)국민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원조' 찾다가 본전도 못 찾은 셈이다"라고 혹평했다.

참여를 제대로 유도해내지도 못한 참여정부가 원조타령만 하다 결국 민주개혁의 근간인 소통마저 그르치게 했다는 것이다. '진보의 퇴조'를 바라보아야 하는 그의 심정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탓이 크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이명박의 절친한 동지인 보수 신문들은 '규제 깨기만 제대로 해도 정권 성공의 절반은 보장'이라고 부추기고 있으니, 이명박은 불도저로 밀고 해머로 깨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할 게 틀림없다"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1년 전, '진보의 냉소주의'를 일찌감치 예견했던 그다. 그래서 인지 현실에 대한 비애가 누구보다 컸으리라. 지난해 5월 30일 <한국일보>에 쓴 '진보적 냉소주의'란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한국인은 '이념'보다는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감안컨대, 진보의 집권을 위해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할 장애가 진보적 냉소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진보적 냉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보수가 진보를 완전히 짓누르고 만 꼴이 됐다. '20대의 보수화'는 진보적 냉소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선 진보논객들조차 할 말을 잃은듯하다. 

수경스님 "20대 보수화, 참으로 낯 두껍고 잔인한 해석"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이다. 삼보일배 주인공 수경 스님이 나섰다. 대선이 끝난 후 지난 3월 22일 <경향신문>에 쓴 '생명의 소리를 들려준 적 있는가'라는 칼럼에서 그는 '20대의 보수화'라는 표현을 우려하며 이렇게 타일렀다.

"이제는 보편 용어가 되어 버린 듯한 88만원 세대들의 상당수가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20대의 보수화라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으로 낯 두껍고 잔인한 해석입니다."

그는 "취직을 목전에 두고 있고, 등록금 대출 이자를 갚느라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아르바이트 현장을 전전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택한 것을 '보수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라고 경고했다. '진보를 철 지난 이념으로 색칠하려는 퇴행적 수구의 시각'이라고 그는 꼬집었다.

그러더니 칼럼 말미에서 이런 답을 던졌다. "진보는 이념과 관계없이 추구해야 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건강한 지향입니다"라고. 총선이 끝난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유효하리라 믿는다.

이태수 "반동의 시대를 즐길 수 있는 역설적 처세법 절실"

▲ 지난 2003년 삼보일배로 서울에 입성한 직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자료사진). ⓒ 권우성

<한겨레> 객원논설위원인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가 22일 쓴 '반동의 시대를 사는 법'이란 제목의 칼럼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진정한 보수라면 가치면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효율성, 시장을 신봉하면서도, 실천면에서는 도덕성과 투명성, 법치성을 갖추고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는 천박한 보수, 사이비보수에 다름 아니다"고 보수회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진보의 철학과 정책이란 씨앗을 그 토양에 뿌리고 부지런히 소통이란 이름으로 땅을 갈아 나간다면 희망의 한국사는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지 않을 리 없다"고 했다. 그는 또한 "반동의 시기를 진보의 디딤돌로 삼은 수많은 역사가 있기에 이 반동의 시대를 즐길 수 있는 역설적 처세법이 지금 우리에겐 절실히 필요하다"고 답을 내렸다. 답이야 어떻든 일단 그는 보수위에 진보가 있음을 위안으로 삼았다.

지역의 대안매체들도 표류하는 진보활로 찾기에 나섰다. 그 중 <경남도민일보>의 '새로운 진보 찾기'에 대한 의제설정이 돋보인다. 25일 백두주 부산대 사회학과 연구교수를 통해 대안을 모색했다. 백 교수는 '진보의 새 길 찾기'란 제목의 칼럼에서 진보의 위기와 해법을 제시했다.   

백두주 "진보진영, 생태적 가치 통해 물질주의에 맞서야"

백 교수는 "국가권력·의회권력에 더해 지방권력까지 보수독점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동시적 보수화는 진보세력의 성장토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전제했다.

또한 그는 "진보세력의 혁신이 없다면 보수세력에 의한 권력독점은 지속될 것이고,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 현상도 심화될 것"이라며 "최근 진보진영에서는 '진보의 재구성'이 뜨거운 화두로 부상하고 있지만 낡고 닫힌 진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방향과 내용을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대안 없는 진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진보진영은 생태적 가치를 통해 물질주의 및 경제적 가치에 맞서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선언적이고 당위적 수준을 넘어 모든 진보운동에 생태주의를 결합하려는 의식적 노력 없이는 진보운동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무분별한 개발논리와 분권을 스스로 훼손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보수진영에 맞서 진보진영이 대안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부의 낡은 관행과 가치, 이념을 혁파하고 대중과 소통방식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진보는 패배감과 절망감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 현실과 전망을 검토하고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제 진보는 과거의 처세술이나 이기주의의 냄새만을 맡는 기존 습속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이른바 우파를 참칭하던 극우세력들의 글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진보논객들이 다시 일어서야 한다. 강건한 진보담론이 아쉬운 계절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