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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모교에서 37년 만에 "차렷! 경례~"

강화 신성초 11회 동창회 '다시듣는 수업' 현장

등록|2008.04.28 09:26 수정|2008.04.28 10:32

▲ 1971년 2월 촬영한 신성초등학교 11회 졸업생들의 기념사진. 뒤로 보이는 학교 건물이 자리잡은 곳에 현재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가 들어서있다. 앞줄 맨 왼쪽이 '다시 듣는 수업'을 맡아 주신 전애자 선생님이다. ⓒ 신성초등학교 11회 동창회



강화군 불은면 넙성리 오마이스쿨(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 입구에 이채로운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신성초등학교 11회 졸업생 - 다시 듣는 수업.'

오마이스쿨은 1997년 폐교한 신성초등학교에 들어섰기 때문에 신성초등학교 동창회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런 오마이스쿨에서 신성초등학교 11회 졸업생들이 옛 은사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듣는 수업'이란 제목 아래 모인 것이다.

다시 듣는 수업은 27일, 오전 11시부터 오마이스쿨 강당에서 열리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지만, 1시간 전부터 서울, 경기도 강화·양평, 강원도 강릉, 경상도 김해 등등에서 흩어져 사는 동창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봄 날씨치고는 제법 쌀쌀한 날씨를 피해 세미나실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차를 한 잔씩 마셨다.

"예쁠 땐 알방구리 미울 땐 똥방구리"

▲ 신성초등학교 11회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김부현씨. ⓒ 조경국


"어휴, 쟤가 만날 고무줄 끊고 때렸다니까?"
"내가 짖궂긴 했지만 때리진 않았지."
"현옥이는 키 작다고 별명이 '꽁치'였지. 키 크다고 갈치라고 부른 애는 누구였더라?"
"정애 쟤는 별명이 '방구리'였잖아. 예쁠 땐 '알방구리' 미울 땐 '똥방구리'!"
"쟤는 이르기 대장이었어."
"까르르르……."

37년 전인 1971년 신성초등학교를 졸업한 58년 개띠들의 수다는 끊이질 않는다. 이제는 애들도 어지간히 키우고 자기 인생을 되돌아볼 나이가 된 58년생들에게 초등학교 동창회는 마음의 고향인 듯 하다.

다시 듣는 수업 모임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여 통이 넘는 전화를 했다는 김부현 동창회장(세림텍스 대표)은 사회에서 만난 그 어떤 모임보다 초등학생 동창 모임이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때묻지 않은 시절이 그리운 것이죠. 초등학생 친구들 만나면 예전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서 좋고요. 더군다나 교정에서 만나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네요."

고향 넙성리에 가족이 살고 있는 김부현 동창회장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모임이 지속될 거"라며 초등학교 동창 예찬론을 펼쳤다.

"혹시 교가를 기억하는 분 있나요?"

부반장을 했다는 최삼희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한 자락 운을 뗀다.

"대모산 힘찬 줄기 강화를 이루고 손돌목 높은 파도 우리 기상일세."

▲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 하고 있는 한덕희(왼쪽), 박순옥씨. ⓒ 조경국


"아직 교가 기억하는 분 있나요?"


"삼희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더니 아직도 교가를 외우고 있네. 얘들아,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뭔데?"
"칠순 넘은 할머니가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는데, 누가 교가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서 교가를 부른 거야,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하하하하!"
"그런데 그 할머니가 집에 와서 할아버지한테 그 얘기를 똑같이 들려주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교가였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니?"
"뭔데?"
"할멈. 우리 교가도 그 노래였는데……."
"으하하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옛 이야기 하는 사이에 11시 '다시 듣는 수업' 종이 울렸다.

오마이스쿨(구 신성초교) 주변에 사시는 신성초교 동문들뿐만 아니라 옛 학부모님들도 함께 참석한 뜻깊은 자리였다. 사회는 인천에서 자영업을 하는 임성열 총무가 맡았다.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교가 아닌!)가 흐르는 가운데 옛날식 국기에 대한 맹세가 흘러 나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모두들 초등학생이 된 듯 바른 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고 식순에 따랐다.

"다음은 신성초 1회 졸업생이신 구경회 군의원님의 격려사가 있겠습니다."

▲ 구경회 강화군의회 의원. 신성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참석했다. ⓒ 조경국


구 의원은 강화군에서 3선째 군의원을 하고 있다.

"졸업한 지 37년째 되는 후배들을 폐교가 된 모교에서 만나보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동안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보릿고래를 넘어 힘들게 살아오느라 애환도 많았을텐데 그래도 고향에서 동창 친구를 만나게 되니 행복하기 그지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인생의 후반기라 할 수 있는 오십 고개에 올라섰는데 앞으로 남은 세월은 힘닿는껏 사회에 봉사도 하고 반칙하지 말고 정직하게 결승점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전애자 선생님의 '다시 듣는 수업'이 있겠습니다."

전애자 선생님은 스물 두 살에 교대를 졸업하고 신성초등학교에 발령받은 뒤 6년 6개월간 근무하고 인천, 서울에서 교편을 잡다가 작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차렷! 경례."

옛날 반장 고상남씨의 씩씩한 구령에 따라  인사를 받은 뒤, 선생님은 준비된 출석부를 읽어갔다. 모두 54명의 졸업생 중에 30여명이 참석했다. 그 사이 세 명은 유명을 달리했고, 연락이 끊긴 이도 여럿 있다고 한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동창회장은 스크린에 띄운 졸업앨범의 얼굴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흑백 졸업앨범 속의 단발머리·까까머리 초등학생들은 착한 자세로 반듯하게 서 있었다.

37년 만에 불러보는 출석부

출석부 이름을 부른 뒤 선생님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37년 만에 제자들에게 수업을 했다.

"저기 창밖의 운동장에 높다랗게 서있는 포플러·노간주나무 같은 나무가 보이죠. 제가 부임한 뒤 학생들하고 함께 심은 나무들이에요."

37년의 세월은 코흘리개 학생들뿐만 아니라 나무들이 성장하는 데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러분 옥수수빵 먹던 기억나요? 처음엔 옥수수가루 빻아서 학교 숙식실에서 쪄서 나눠주었지요. 그리고 나무젓가락 만들어서 송충이 잡으러 다니던 것 생각나요? 지금 같으면 교장 선생님한테 '이것은 애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고 항명했을 텐데, 그 땐 국가시책이라 그렇게 할 수 없었죠. 퇴비만들기 하던 일, 전등사·광성보로 걸어서 소풍가던 것도 생각 나네요."

환갑이 지난 전애자 선생님은 이십대 초반의 앳된 여교사로 돌아가 추억의 보따리를 맘껏 풀어 놓았다.

"제가 부임한 뒤부터 강화 길상면의 강남중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봤어요. 그 때 학부모님들이 그래도 중학교에는 가야 된다면서 학교에 전기 설치하는 것을 도와주고 비싼 시험지도 구해주고, 저녁 늦게까지 공부했어요. 그 때는 저도 경험이 짧아서 가르치는 게 서툴렀는데, 아이들 성적이 안 오르면 혼자서 울곤 했지요."

젊은 여교사로서의 애환도 털어 놓았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하얀 양복에 하얀 구두 신던 멋쟁이였는데 청소를 얼마나 철저히 관리하던지 비품에 먼지라도 하나 있으면 난리가 났죠. 그리고 난 강화에서 자라서 풍금도 잘 못 쳤는데 처음에 애를 많이 먹었죠."

선생님의 수업이 끝난 뒤 모두 일어나 교가 제창을 했다. 신성초 1회 졸업생이라는 넙성리 이장님도 따라 부르셨다.

"대모산 힘찬 줄기 강화를 이루고 손돌목 높은 파도 우리 기상일세. 이 곳에 우뚝 솟은 신성학교는 배움의 터전이요 문화의 선봉."

얼굴에 동심의 꽃이 활짝 피어난 나이 오십의 학생들이 입을 모아 교가를 부른다. 뒤이어 경기도 양평에서 국악 봉사 활동을 한다는 예쁜 '알방구리' 최정애씨가 동창, 고향 어른 들 앞에서 노랫가락을 구성지게 뽑았다.

"꽃 사시요. 꽃을 사시오 꽃을 사. 사랑·사랑……."

▲ 전애자 선생님이 신성초등학교 11회 졸업생들의 출석부를 부르고 있다. 졸업한 지 딱 37년만의 일이다. ⓒ 조경국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야"
['다시 듣는 수업'에서 못 다한 말] 전애자 (전 신성 초등학교 교사, 63)

▲ 신성초등학교가 첫 부임지였던 전애자 선생님. ⓒ 조경국


- 강화가 고향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강화군 양도면이 고향이에요. 아버지가 농사지으면서 6남매 중 5남매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셔서 면사무소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셨죠. 교육열이 있는 아버지 덕분에 시골에서 살면서도 교사가 될 수 있었고요."

- 평생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왔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이었나요?
"정직하게 살아라.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죠. 누가 알아주건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아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봐요."

- 사회 전반적으로는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학생들에게만 그런 것을 강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쉽지 않은 얘기죠. 요즘은 초등학생도 상급생만 되면 선생님들이 정직하게 살라고 하면 귀담아 듣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들면서 드는 생각이 그래도 도덕적으로 살아야 후회가 적다는 거예요."

- 이제 오십을 넘어선 인생의 후배이자 제자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주마가편이란 말이 있어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라는 것이죠.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지만, 더 잘할 수 있도록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덧붙이는 글 신성초등학교 11회 졸업생이 함께 모였던 '다시 듣는 수업'은 오는 6월 14일 한번 더 열린다. 이번에는 1회, 4회 졸업생이 옛 은사를 모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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