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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보다 못한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 '해봤어?' 리더십이 박미석 사태 불렀다

[데스크 칼럼] 이한기 뉴스게릴라본부장

등록|2008.04.28 09:28 수정|2008.04.28 09:37

곤혹스런 박미석 수석농지법 위반 및 서류조작 의혹을 받아 사의를 표명한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왼쪽)이 지난 27일 오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 참석, 변도윤 여성부장관과 얘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언론사 데스크는 말 그대로 '책상물림'이 되기 십상이다. 현장 기자가 자기 기사를 쓸 때는 남의 기사를 보기 힘들지만, 데스크는 반대다. 남의 기사를 보다보니 정작 자기 기사를 쓰기 힘들다. 머리 속으로는 탈고까지 마친 글인데도, 정작 독자들에게 꺼내놓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내 경우에 5할은 게으른 탓이다.

기사를 읽는다고 해서 꼭 정독을 하는 건 아니다. 벼락치기 공부처럼 수박 겉핥기로 글을 볼 때에는 나중에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기 어렵다. 기사의 이미지만 머릿속에 남는 경우가 많다. 비슷비슷한 주제의 글을 많이 본 경우에는 더욱 그 증세가 심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런 직업병이 있다.

지난 25일 보도된 "박미석 수석, 급조한 자경확인서 옆 동네 통장 서명 받아"라는 기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손병관 기자가 '땅 투기'에 '거짓 해명' 의혹까지 받고 있던 박 수석의 영종도 논을 현장 취재하고 와서 쓴 글이다. 손 기자는 이 기사에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박 수석이 급조한 '자경확인서(직접 농사를 지었다는 증빙 서류)'에 사인을 해준 사람이 그 땅의 관할 통장이 아니라 옆 동네 통장이었다는 것이다.

27일 밤 주말 당직 데스크를 마감하려는 즈음에 '속보'가 전해졌다. "박미석 수석, 이 대통령에게 사의 표명". 부랴부랴 해당 기사를 처리하고나서 손 기자의 '통장 서명' 기사를 다시한번 훑어봤다.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관할지 통장이 존경스럽네(왕건 ksjm17)'. "(관할 통장이) 자경확인서 서명을 거부했다는 것은 박미석이 투기꾼임을 알아본 것"인데 청와대는 왜 몰랐느냐는 질책이다.

청와대, 시골 통장의 상식에서 배워라

관련된 부분의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니, 내용이 이렇다.

(박 수석 땅 관할인) 24통 통장은 자경확인서를 써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나는 외지 사람들에게 확인서를 써주지 않는다. 그 일은 동사무소에서 할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관할 동사무소 직원로부터 자경확인서를 발급받게 되어있는데, 일부 통장이 '편의상' 자경확인서에 서명을 해줬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박 수석 측에 전달된 자경확인서에 서명을 해준 김모씨는 "추아무개씨가 20일 찾아와서 '이곳 쌀이 좋아서 농사지어 먹으려고 땅을 샀는데 투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안 되겠냐'고 하면서 자경확인서를 요구했다"며 "양도소득세 문제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하여간 그런 요청이 1년에 몇 건씩 있다"고 전했다.

▲ 25일 오후 한 방송사 취재팀이 인천시 운북동에 위치한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부부의 논을 둘러보고 있다. ⓒ 손병관


박 수석이 '전봇대 뽑듯' 만들어 청와대에 제출했다는 '자경확인서'가 법적 효력이 있고 없고는 논외로 치자. 마지못해 외지인에게 자경확인서에 사인을 해주었다는 옆 동네 통장의 이야기도 잠시 미뤄두자. 그러니 명확해진다. 농사를 짓지 않은 외지인의 자경확인서에 사인을 해주지 않은 해당 통장의 '당연한' 일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궁금하다. 농지는 '농사를 짓는 땅'이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게 농지법이다. 그건 법이기에 앞서 상식이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통장의 상식을 청와대만 모르고 있었던 걸까?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투자 가치가 있는) 땅을 사봤어?"라는 물음에는 잽싸게 몸을 날렸지만, "(농지법 위반을 감수하면서도) 땅을 사야 돼?"라는 물음에는 귀를 막은 탓이다. 박 수석이 그랬고, 그를 검증했다는 청와대가 그랬다. 사의를 표명하진 않았지만, 곽승준·김병국 수석이나 이동관 대변인 등도 '박미석 사태'와 다를 바 없는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해볼만큼 해본 것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 가운데 하나가 "해봤어?"라는 물음이다. '왕회장'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배웠다는 '경험 리더십'이 응축돼 있는 말이다. 이 대통령 당선 이후 "해봤어?"는, 무슨 일을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 꼬리 내리는 '복지부동'에 죽비를 내리치는 것인 양 세뇌돼왔다.

"해봤어?"는 결정적인 맹점을 안고 있다. 그 안에 '방향'이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해보는 건 의미가 없다. 좌충우돌이며 혼란을 부추길 뿐이다.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해봤어?" 이전에 "생각해봤어?"가 선행돼야 한다. '어떤 효과가 날 지', '이게 맞는 방향인지 틀린 방향인지' 생각해보고 난 뒤 해야 한다.

영어공교육, 학교자율화, 재벌규제 완화, 한반도대운하 등 이미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추진해봤지만, 정작 그런 일들에 대해 제대로 한번쯤 생각해봤는지는 의문이다. '강부자 내각' 파동으로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조각에서부터 여러 명의 장관 후보자들을 낙마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었을텐데도, '강부자 수석'으로 판박이 시행착오를 겪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해볼만큼 해본 것 아닌가. 이젠 해보기 전에 생각해야 할 때다.

청와대의 '강부자' 수석들이명박 대통령 뒤편 왼쪽부터 유우익 대통령실장, 김병국 외교안보수석, 김중수 경제수석, 박미석 사회정책수석, 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 박재완 정무수석, 이종찬 민정수석, 곽승준 국정기획수석,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시계를 거꾸로 돌려 5년 전, 참여정부 출범 초기로 돌아가보자. 당시 이정우 정책실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심심한 대통령이 돼라"고 건의해 화제가 됐다.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최고 지도자에게는 고독할 만큼의 사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 실장의 조언은 결국 덕담으로 그쳤고, 노 대통령은 심심하지 않은 대통령 임기를 보냈다.

'심심한 대통령'이란 건 말이 쉽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심심한 대통령'이 주는 메시지는 휴식이나 사색의 '양'이 아니라 '질'에 관한 문제다. 그런 점에서 '심심한 대통령'은 못 돼도, '생각하는 대통령'은 돼야 한다는 충고였을 것이다.

이정우 실장의 충고는, 밀가루 값에서부터 청와대 비서동 전등끄기까지 앞장서 챙기는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도 되새겨볼 만 하다. '해봤어?'가 갖는 여러 가지 장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봤어?'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이 대통령의 입에서 '생각해봤어?'라는 말도 종종 나왔으면 좋겠다. 아직은 낯설고 입에 붙지 않은 말일테니, 우선 거울 앞에 서서 연습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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