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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떠올랐던 장날

홧김에 비싼 '유산슬 밥'도 시켜먹고...

등록|2008.04.29 11:02 수정|2008.04.29 11:02
청와대 수석들의 땅 투기 기사가 인터넷 뉴스 메인 자리가 좁을 정도로 넘쳐, 누리꾼들이 분노했던 어제와 오늘(29일), 부산 날씨도 무척 속상했나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는 떴는데도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더라고요. 

지난해 겨울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올해는 청명한 하늘을 보기가 '꿈에 떡 얻어먹기'만큼이나 어렵군요. 그래도 새벽 동트기 전부터 시작되는 새들의 합창은 계속 들려와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낙동강아파트 단지 앞산에서 바라본 구포대교와 낙동강. 남해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오가는 차량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일개미를 연상시킵니다. ⓒ 조종안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직선으로 500m 거리에는 낙동강이 흐릅니다. 낙동강을 끼고 경부선 철도가 놓여 있고요. 문을 열면 기적소리와 무거운 디젤엔진의 굉음이 방에까지 들리는데, 차들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경부선 철로 위로는 남해고속도로 입구인 구포대교가 우뚝 서 있습니다. 가시거리가 길어지는 맑은 날에는 김해 비행장에 이·착륙하는 여객기들의 낮은 비행이 보금자리에 사뿐히 내려앉는 비둘기를 연상시킵니다.

뒤로는 금정산 끝자락이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데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밖에 나갈 때마다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장까지 왕복 4km 정도 되는 거리가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요. 

하는 일도 없이 마음만 바쁜 장날

오늘도 시장에 다녀왔는데요. 보통 3~4일 주기로 장을 봅니다. 상추 1천원어치만 사더라도 오가며 사진촬영을 하거나 서점에 들를 때도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장을 보는 날은 하는 일 없이 바쁘고 또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어제부터 머리에 메모했던 콩자반(2천원)과 쌈장(2천원), 상추(1천원)만 사오면 되니까 5천원이면 충분한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2만원이 손에 잡히더라고요. 혹시 몰라 그냥 가지고 나갔습니다.

덕천 로터리 뒷골목으로 들어서니까, 차가 사람의 통행을 막고 있는지, 사람이 차를 막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복잡하더라고요. 어디로 비집고 빠져나갈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때야 오늘이 장날인 것을 알았습니다. 장에 가는 사람이 장에 가서야 장날인 것을 알다니 쓴웃음이 나오더라고요.

평소에는 메모를 해두었다가 액수에 맞춰 돈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5천원어치 장을 보러 나오면서 2만원을 가지고 나와서 그런지 길가에 내놓은 과일과 찬거리들이 모두 내 것으로 보이더라고요. 마음이 든든해서 좋긴 했습니다.

정육점에서의 짧은 토론

▲ 구포시장 입구 정육점. 우연한 기회에 주인이 고향 분인 것을 알았는데, 장날(28일)이 월요일이라서 다른 장날에 비해 한가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 조종안


먼저 고향 사람이 운영하는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장날이니 손님이 많으면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마침 한가한 것 같아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려고 왔습니다"라며 들어갔습니다. 고향 사람이라서 한 번씩 들르면 마음에 있는 얘기를 주고받거든요.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타결과 수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사하는 사람 처지에서 수입하는 게 좋다"라며 간단하게 대답하더라고요.

그래서 혼자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정육점 주인들 다수가 원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미국에서 수입하는 고기가 호주산이나 뉴질랜드산보다 맛도 좋고 값도 싸다"라며 "정육점 주인들도 좋아할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광우병 얘기도 나왔는데, 주인은 "옛날에도 수입했었지만 국내에서 광우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사람들이 너무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육점 주인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그렇고 해서 대화를 끝냈습니다.     

정육점에서 나와 쌈장과 콩자반을 사서 오는데, 하얀 플라스틱 병에 들어 있는 콩 국물이 발을 멈추게 했습니다. 콩국수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몇 번 망설이다 한 병 사가지고 왔습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니까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홧김에 비싼 '유산슬 밥'도 시켜먹고...

▲ 담백하고 시원한 계란탕이 곁들여 나오는 ‘유산슬 밥’. 일반 중국 음식점에 서는 1만원이 넘는 데 이곳에서는 5천원이더라고요. 맛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 조종안


시장을 빠져나와 큰 길가로 나오니까 이번에는 찐빵과 만두를 파는 가게에서 하얀 설탕이 묻은 꽈배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열심히 빵을 쪄내는 모습을 구경하는데 손은 꽈배기를 집고 있더라고요.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더라'라는 말이 떠올라 먹으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시 덕천 로터리 골목으로 들어서니까 이번에는 단골로 다니는 '옛날 짜장'집 간판이 눈에 들어오기에 망설일 것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기 바쁘게 40대로 보이는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오더니 묻더라고요. 

"뭐 드실래예?"
"자장면 하나인데. 양 좀 마니 주세요!"
"그럼 곱빼기로 시키시지예···."
"그래요? 음···그럼 자장면 말고 '유산슬 밥'으로···."

다른 때는 양을 조금 많이 달라고 하면 말없이 가져다줘서 고맙게 먹었는데 갑자기 곱빼기로 시키라는 말에 열이 나더라고요. 그냥 나올까 하다 이왕 들어온 거 먹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자장면보다 두 배나 비싼 '유산슬 밥'을 주문했습니다. 

순간의 흥분을 참지 못하고 홧김에 비싼 음식을 주문했으니 금전적으로는 제가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더라고요.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니까요.   

처음 예산대로 쌈장, 콩자반, 상추 해서 5천원만 써야 하는데, 꽈배기, 콩 국물, 유산슬밥까지 먹었기 때문에 예산액보다 3배나 지출했습니다. 하지만, 맛있게 먹었고 즐겁게 지냈으니 이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밥을 먹고 집으로 오는데 붉은 태양에 반사된 낙동강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면서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가 포옹하는 장면이 관객을 열광시켰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떠올랐습니다.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영화 속 정열적인 장면이 아니라, 코흘리개 시절, 고향동네 빵집 벽에 붙어있던 붉은 바탕의 포스터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포스터 그림도 영화 장면 못지않게 멋있었거든요.  

▲ 낙동강의 노을. 붉게 물든 낙동강 황혼이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언 리’가 출연했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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