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장의 무덤에는 풀만 무성해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50] 임병찬 의병장 (3)
▲ 임병찬 장군이 의병을 훈련시켰던 산내 종성 '호남의병' 유적지로 표석만 서 있다. ⓒ 박도
글쓰기가 날로 힘 든다. 가장 큰 이유는 글에 따르는 책임 때문이다.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었다. 그 새 가을에서 겨울로, 봄으로 철이 세 번 바뀌고, 해도 바뀌었다. 이번 기사가 50회로 이제 곧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마무리 기사를 쓸 날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임병찬 의병장 답사기는 다른 어느 분보다 시작도 힘들었지만, 집필 내내 매우 어려웠다.
▲ 임병찬 의병장 ⓒ 박도
이번 답사를 도와주신 몇 분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분들 역시 양론이라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혼자 며칠째 고심하였더니, 아내가 낌새를 알고 영문을 물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명답인데다가, 은사 조지훈 선생 <지조론>을 배우던 교양학부 시절이 떠올라 조지훈전집에서 그 부분을 찾아 읽었더니 답이 나왔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 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라도 머리털 센 다음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고난을 당해도 굽히지 않은 절개)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그 후반을 보라"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 조지훈 <지조론>
▲ 임병찬 의병장 묘소 상석 비명 ⓒ 송희정
정읍에서 돌아온 지 사흘 후, 산내면 종성리 송희정씨가 약속대로 회문산 정상 외진 곳에 있는 임병찬 의병장 무덤 사진을 메일로 보내왔다.
그런데 봉분은 보이지 않고 상석의 묘비명만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고맙다고 전화하자 유감스럽게도 그 사진밖에 없다고 한 즉, 여러 추측을 낳게 했다.
그 하나는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어 봉분까지 풀과 나무가 무성해진 탓일 것이요, 아니면 사진을 찍은 이가 묘비명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송희정씨 말이 아무튼 산소를 후손들이 돌보지 않아 무덤 언저리가 많이 우거진 기억만은 뚜렷하다고 하였다.
▲ 임병찬 후손 임삼씨 ⓒ 박도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후손에게 연결했지만, 서로 생업에 바쁜 탓으로 날짜를 정하지 못하다가, 지난 4월 4일 전해산 장군 아드님 서울 취재 길에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시청 앞 한 찻집에서 만났다.
참 어렵게 만났음에도 임병찬 장군 증손 임삼(69)씨는 그날 하필 급한 일로 곧 인천공항에 가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 속깊은 대담은 하지 못하고 인사와 몇 마디 얘기만 나누었을 뿐이다.
그날 임삼씨는 유림들이 세운 할아버지 임병찬 장군의 사당 하청사(산외면 오공리)는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바, 그 사당을 복원하고 싶다는 소망만 말하고는 바삐 자리를 떴다. 나는 뒤따라 나가 바쁘다는 분을 굳이 붙잡고는 불타버려 흔적도 없는 숭례문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르고는 보내드렸다.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 임병찬 의병장 행적
▲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초토가 된 마을. ⓒ 눈빛출판사
임병찬 의병장 본관은 평택, 호는 둔헌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1851년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16세 때 전주 향시에 급제하여 39세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최익현과 더불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군량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 의병장 민종식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 무성서원 뜰에 선 '병오창의기적비' ⓒ 박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한일병탄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내쫓으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했음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에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 ⓒ 눈빛출판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정읍의병사>을 바탕으로 가능한 글쓴이의 감정을 절제하며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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