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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역사팩션 55] '평화회의'라는 것의 허구성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2008.05.04 19:44 수정|2008.05.04 19:44
물론 외교 위주의 독립운동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파리회의에서 대외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못 냈다 하더라도 그것에 초점을 모아 독립 운동가들이 단결했고 회담에 기대를 품었던 국내인들이 3·1운동이란 놀라운 역사를 만든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신규식은 열강들의 평화회의가 갖는 성격을 이제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민제호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민제호는 신규식에게 파리회의는 이름만 평화 또는 강화를 내세웠지 실제로는 전승국들의 이권 흥정 회담이란 것을 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신규식은 파리회의의 후속회담으로 열리는 태평양회의를 흘려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임시정부가 분열상을 드러내고 있는 시점에 다시 한 번 독립 운동가들의 힘을 뭉치게 할 수 있는 것은 태평양회의뿐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꼭 비관적으로만 보라는 법은 없는 것이었다. 태평양회의에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임은 분명했다. 태평양회의 전에 중국의 호법정부로부터 정부 승인을 얻어내고 그들과 함께 태평양회의에 참석할 수만 있다면 망외의 성과를 기약해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제호의 견해는 비정하리만치 차가웠다.

“미국이 일본에게 개전을 선포하지 않는 한, 외국의 힘에 의해 한국이 독립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파리회담에 실망했던 독립운동가들이 태평양회의에 기대를 모았다가 또 실망하게 될 때 분열은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예관 선생님, 중국과 협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외교 노력은 멈추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 어렵다고 해도 그것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태평양회의의 대표 파견을 의결하고 서재필과 이승만을 특사로 지목했다. 신규식은 어려운 때일수록 대외적인 일이 있어야 결속이 강화되는 것을 실감하고 일단 태평양회의에 진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의 <신보>는 ‘태평양회의와 한국 문제’라는 제하의 가사를 실었다. 한국 독립 문제는 이번 태평양회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제 일본의 각 법률 단체는 대한민국의 총리 신규식이 보낸 통고를 받았다.

“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와 귀국은 국경이 접해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유구한 친선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지금 동방 각국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귀국의 침략으로 인한 황폐화가 심해 그 고통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욕심낸 나라는 바로 귀국이었습니다.

일본은 번번이 자위라는 말로써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데, 진정으로 자위를 이루고 싶으면 우리나라에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표를 파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귀국이 자발적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들이 귀 정부를 재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귀국의 자구책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신규식은 정신적 단결의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임시정부를 지원할 수 있는 학술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의견이 많이 있던 터였다. 겉으로는 학술지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선전지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있는 돈을 거의 털어 우선 주간지를 창간하기로 했다.

잡지의 명칭은 <진단>으로 하기로 했다. 민필호가 워낙 부지런하게 활약해 창간 작업은 기대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그는 중국의 인사들에게 창간 소식을 알렸다. 많은 축하 전문이 들어왔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도 다투어 축하하는 글과 시를 써 보냈다.

호법정부의 총통 손중산은 ‘세상은 국민의 것이다.(天下爲公)‘, 장개석은 ‘어려움 속에서 한 마음으로 협력하자(同舟共濟)’라는 제사를 써 보냈다. 이 밖에도 10여 명의 중국 각료급이 축사를 보냈으며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이동휘 등의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하나같이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스스로 창간사를 써 <진단>지 창간호에 게재하였다.

이제야 우리는 내막을 알게 되었다. 한국이 합병된 역사를 회고해 보건대, 우리와 정식 외교 관계가 있던 중국과 영국과 미국은 늦가을의 매미처럼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들은 공리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재난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고달픔과 참담함을 이기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작년 3월에 우리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계인들이 비로소 우리의 정신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조국과 진리를 위한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부응하고자 이 잡지는 창간된 것이다.

발행 첫머리에 향후 우리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1. 민족 자결을 쟁취한다.
2. 독립과 평등을 주장한다.
3. 국제적 우호 관계를 형성한다.
4. 세계 문화를 받아들인다.
5. 지금의 실상을 알린다.

신규식에게는 또 다른 현안이 있었다. 그는 주변 측근들을 모두 소집했다. 일본군의 만주 지역 조선 광복군 대토벌 작전에 밀려 한국 독립군 부대가 노령으로 퇴각한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조선 독립군에게 대패했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패는 일본의 집권 세력에게 타격을 줄 정도로 파장이 컸다. 보도가 통제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일본의 유역 일간지들은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를 1면 톱으로 보도하며 조선 독립군 토벌의 시급성을 부추겼다.

민제호, 백주원, 김태수, 민필호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신규식의 아내 조정완은 그들을 위해 따뜻한 밥과 된장 아욱국을 준비했다. 그들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신규식은 숟갈을 놓자마자 민제호에게 물었다.
“민 동지, 괜찮을 것 같소?”

신규식은 노령으로 퇴각하는 한국 독립군 부대가 소련에게 보호받을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좀 더 정밀한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민제호 역시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신규식은 서일(徐一), 김좌진과 그 휘하에 있는 이범석을 떠올렸다. 그는 독립군 가운데 서일과 김좌진을 가장 큰 재목으로 여기고 있었다. 서일은 대종교도로서 일찍부터 신규식과 친분이 있는 무관이었다. 나이는 신규식보다 두셋 연하였다. 그리고 김좌진은 김태수와 비슷한 연령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기와 지혜와 순수성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운남군관학교에 보낸 이범석이 김좌진의 휘하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민제호는 제대로 답변을 못 드려 죄송하다고 말했다.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된 소련의 정책을 아직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2, 3일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럼 여기서 모두 함께 묵으며 연구해 봅시다.”

네 사람은 신규식의 집에서 먹고 자며 많은 책과 잡지와 신문을 읽었다. 그들은 한국 독립군과 소련 혁명정부 그리고 일본의 대외정책 등을 분담해서 연구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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