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합의, 아직 종잇조각일 뿐이다
[주장] 장관이 살신성인 않고도 국민 건강 지키는 법
▲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7일 국회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관련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들으며 이마의 땀을 닦고 있다. ⓒ 남소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과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질의 응답입니다. 정말 살신성인 멸사봉공, 공직자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겠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장관은 정부청사 공무원들도 모두 그렇게 살신성인할 것인지 미리 확인해보셨을까요? 저는 과천에 삽니다. 아이들 친구 부모님 몇 분은 과천정부청사에 근무합니다.
애꿎은 공무원들만 미국산 쇠고기 꼬리곰탕 생체실험에 동원되게 생겼습니다. 정부청사 공무원들의 건강권은 누가 보장해주나요? 그 댁 아이들의 삶은 누가 책임져주나요?
정운천 장관, 그제까지만 해도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니, 청문회에서는 여중생의 전화를 받은 뒤 고민과 결단 끝에 "국민들의 걱정이 심각하니 광우병이 발생하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단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통상마찰까지도 감수하겠다고 합니다. 스스로 꼬리곰탕을 드실 뿐만 아니라,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면 통상마찰을 감수하기까지, 대단합니다. 살신성인의 화신입니다.
살신성인의 화신, 통상마찰까지 감수하겠다?
통상마찰로 생기는 막대한 배상명령 또는 무역보복을 장관은 어떻게 감수하실지요? 국민 세금으로 메우지 않고도 감수할 방법이 있으신가요? 땀 좀 나시나요? 안심하십시오. 살신성인 하지 않고도 국민 건강 지킬 방법이 있습니다. 알려드립니다. 단, 서둘러야 합니다.
비장한 결심으로 국민 건강 지키겠다고 나서신 두 분, 아직 4월 18일자 한미간 합의가 효력 자체도 생기지 않았다는 점은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한미간 합의서가 아직 효력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 여러분은 아셨습니까? 정부도 미국도 재협상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하니까, 하도 뚝 잘라 말하니까, 이미 확정되어 효력이 짱짱한 합의서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사실, 저도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미간 합의서 아직 종이쪽지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한미간 합의가 체결된 지 20여일이나 지나, 어제 5월 6일에야 농림수산식품부가 공개하여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쇠고기에 관한 한-미 협의 요록>에 첨부된 <Import Health Requirements for U. S. Beef and Beef Products(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 수입위생조건)>에, "Addendum 1. This notice will go into effect on the date of its notification.(이 고시는 고시한 날부터 시행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은 미국에 대해 언제까지 수입위생조건을 개정 고시하도록 기한을 정하고 고시하여야만 한다는 법률적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합의 요록의 어느 문구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게 5월 15일까지 꼭 수입위생조건을 개정 고시해야만 하는 법률상 의무를 지우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에 전달한 농림부의 의향과 예상만 있을 뿐입니다. "한국은 2008년 5월 15일에 법적 절차가 종료되어 시행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하였다"는 문구로요.
이것은 국가에 법률상 권리와 의무를 부과하는 조약문이 아닙니다. 그저 회의에서 한국의 계획을 말한 것 뿐입니다. 합의서 자체의 효력이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 수입위생조건>을 개정 고시해야만 생긴다고 합의문에 써놓은 것입니다.
이럴 수가! 개정 고시 전에는 언제든 다시 협의해서 바꿀 수 있는 거죠. 아직, 한미간 합의서는 아무 효력도 없습니다.
개정 고시 미루고 재협상하면 된다
농림수산식품부, 너무합니다. 이래서 합의체결 뒤 20일가량이나 합의서를 공개하지 않고 숨겨두었던 것인가요? 정말 너무합니다. 국민 건강이 그렇게도 걱정되어 통상마찰이라도 감수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개정 고시로 한미간 합의서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부터 포기해야 합니다. 아직 숨쉬지도 않는 합의서에 불과합니다. 내용을 바꾸자고 미국에 통보하면 자동으로 그만입니다. 개정 고시 전에 하기만 하면 됩니다. 통상마찰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개정 고시 전에 다시 협상하자고 통보하십시오.
미국이 다시 협상장에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면, 개정 고시 하지 말고 미루십시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고시행위가 없이는, 합의는 우리 국민들을 광우병 위험에 몰아넣는 프랑켄쉬타인이 아니라 종잇장에 불과합니다. 개정 고시 전까지 급한 것은 미국입니다. 미국이 도의적인 책임을 거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통상마찰까지 감수하겠다는 정부인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캠프 데이비드 숙박료 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하라고, 한국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데 미국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정이란 그런 거라고, 미국의 친구에게 말씀하십시오. 친구가 그 정도도 못해주겠습니까. 개정 고시하고 나면 미국은 친구가 아니라 냉혹한 계약 상대방으로 모습을 바꿀 겁니다. 그 전에 말해야만 합니다.
합의서의 단 한 문구라도 고쳐놓고 국민 건강을 거론하십시오. 그래야 국민에게 책임지는 공무원이 됩니다. 살신성인 필요없습니다. 재협상 통보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주십시오. 통상협상의 절차도 제대로 모르고 협의문서의 효력이 언제 발생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미국과 협상 끝나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지레 물러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어떻게 강대국에 맞서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겠습니까.
만들어놓은 합의서도 아무 검토하지 않고 개정 고시부터 했다가 나중에 광우병 생기면 수입중단해서 통상마찰까지도 감수하겠다고, 국가가 손해보고 국민 세금 낭비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안일한 자세로 어떻게 이 국제경쟁시대에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습니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대로 개정 고시 했다가는 어떤 피해가 국민에게 닥쳐올지 모릅니다. 하나 더 짚어둡니다. 앞으로는 합의 체결하면 그 합의가 무엇이든 즉시 국민들 앞에 내놓고 해석을 구하십시오. 합의서 만들어놓고도 스스로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이번에 여실히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국민들에게 합의서 공개하지 말라고 상대방 나라가 압력이라도 넣을 것이 걱정되시면, 하루 빨리 통상절차법을 만드십시오. 이 법 때문에 우리는 국민들에게 합의서를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의견을 듣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버티면 됩니다. 그것이 협상입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를 현실로 만드는 길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정희 기자는 민주노동당 제18대 국회의원 당선자이며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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