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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요정이 절집으로 바뀌었네!

[쿠하와 함께 걷기 ⑨] 부처님 오신 날 다녀온 성북동 길상사

등록|2008.05.14 11:00 수정|2008.05.14 11:22
지난 4월 법정 스님이 1000여 명의 불자가 참석했던 자리에서, 한반도 대운하를 강도 높게 비판하셨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노스님의 대운하 반대는 매달 펴내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얇은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업으로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크게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끔찍한 재앙이다. 우리 국토는 오랜 역사 속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우리의 몸이고 살이고 뼈이다. 이 땅에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 국토에 대한 무례이고 모독임을 알아야 한다.

물류와 관광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몇 푼어치 경제논리에 의해 이 신성한 땅을 유린하려는 것은 대단히 무모하고 망령된 생각이다. …(중략)… 운하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발 사업으로 치솟는 땅값에 관심이 있는 땅 투기꾼들이다. 그리고 건설공사에 관심이 있는 일부 건설업자들 뿐이다. …(중략)… 이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면 우리는 이 정권과 함께 우리 산방한담 국토에 대해서 씻을 수없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 <맑고 향기롭게> 5월호 '산방한담' 중에서.

▲ 일주문을 지나자 불자들이 '한반도 대운하 반대'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 정진영


가장 세속적인 공간이 가장 금욕적인 공간으로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길상사를 찾아갔습니다. 쿠하를 제외하고 모두 가톨릭 신자지만 부처님 오신 날 절집에 소풍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따라나섰습니다. 법정 스님과 활동해 온 시민들의 모임인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 길상사는 불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되는 명상 공간인 '침묵의 집'이 있어,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입니다.

길상사는 고가의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성북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면 높은 담벼락 사이로 걸어야 하는 산동네답지 않은 산동네입니다.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고급 요정으로 불리던 대원각을 법정 스님이 시주받아 절집이 된 특이한 배경을 가진 곳입니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만난 풍경은 '한반도 대운하 반대' 서명입니다. 잔칫집 같은 절을 아이와 함께 찾은 부부가 서명을 하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길상사의 오래된 나무와 야생화들은 코와 눈을 즐겁게 합니다. 주위에 눈에 거치적거리는 간판이 없고, 집과 집 사이에도 각자의 정원이 딸려 있어, 밀집해 있는 집들이 주는 피곤한 기운이 없습니다. 동네 전체에 흐르는 여유로운 초록 색감이 저절로 부러워졌습니다.

▲ 요정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선방으로 쓰입니다. ⓒ 정진영


요정으로 쓰이던 수십 채의 부속 건물들은 이제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장 세속적인 공간이 가장 금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열린 마음이야말로 부처의 마음일 것입니다. 고위층이나 이용했을 법한 비밀의 정원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열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윤회가 또 없습니다.

독립된 작은 집들이 강원도 어느 숲 속의 통나무집 펜션을 닮기도 했습니다. 오색 연등이 걸리지 않았다면 이곳이 절인지, 펜션인지 한참 봐도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울긋불긋 단청이 그려진 뻔한 절집이 아니고 조경도 일반적인 절에서 보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절에 왔다는 생각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은 오로지 길게 늘어선 연등과 삼삼오오 부지런히 모여 다니는 전형적인 '보살님 패션'을 하신 아주머니들 뿐입니다.

꼬불꼬불 파마머리한 아기 부처님 생일

▲ 이철수 판화에서 본듯한 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고는 아는 체를 합니다. ⓒ 정진영

부처님 오신 날을 쿠하에게 설명해 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꼬불꼬불 파마머리한 아기 부처님 생일'이라고 말하자 알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근데 '생일 축하합니다'(=생일 케이크)는 어디 있어?"하고 묻습니다. 쿠하는 가족 생일 몇 번과 1월에 있는 제 생일에 노래하고 촛불 끄고 박수 쳤던 경험이 있어 생일날에는 반드시 케이크에 불을 붙여야 하는 줄 압니다.

제 생일날 촛불 끄는 재미를 붙여서 언제 어디서든 케이크만 보면 초 켜고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이 들어버렸습니다.

사람이 많았지만, 그리 시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모두들 관광지에서처럼 들뜬 기색으로 대놓고 떠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내는 인파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지만, 유독 야단법석인 곳이 눈에 들어옵니다.

연꽃 만들기와 나무 목걸이 만들기, 친환경 샴푸와 세제 만들기, 순면 달거리대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나무 목걸이와 연꽃은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재료를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초등학생들과 부모님들이 키 낮은 목욕탕용 의자에 앉아 열심히 만들고 있었는데, 쿠하는 아이들이 완성해서 들고 다니는 연꽃과 목걸이를 자기도 만들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 부모와 아이가 함께 만들 수 있는 체험장이었습니다. ⓒ 정진영

가위놀이와 풀칠하기, 물감놀이를 좋아하는 녀석에게 언니 오빠들이 하는 작업이 탐이 날 수 밖에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엄마가 연꽃 만들기 세트를 받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얇은 습자지 꽃잎을 종이컵에 붙이는 작업은 아이가 하기에 적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엄마와의 합작으로 어영부영 연꽃이라고 우길 만한 수준으로 완성하고는 손가락에 걸고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게다가 작은 나무판을 사포에 갈고 그 위에 고양이 스티커와 구름 모양 스티커를 붙인 나뭇조각을 꾸밉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서 갖가지 색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 점을 찍어 만든 목걸이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지 바로 목에 걸어달라고 합니다.
(이틀이 지난 오늘도 목걸이의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우리와 헤어져 산책을 다닌 할머니 할아버지께 연꽃과 목걸이를 자랑하느라 아이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할아버지 이거 내가 만들었어요. 예쁘죠?",
"할머니 이거 목걸이야.",
"엄마랑 만든 연꽃이에요, 할아버지."

▲ 고사리 손으로 만드는 연꽃 ⓒ 정진영



▲ 진흙에서도 피는 연꽃을 닮은 아이로 자라길 바라면서 한장 한장 붙여봅니다. ⓒ 정진영


대중과 함께 하는 음악회

▲ "파마머리 아기 부처님 생일 축하해~" ⓒ 정진영

지난해 가을, 계곡을 타고 이어지는 선운사 단풍을 보러 갔을 때, 사천왕상을 보면서 무섭다고 엄마 가슴으로 파고들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서 그보다 더한 이미지를 보여줘도 끄떡 없습니다. 물론 길상사에서는 위협적인 조형물을 애써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길상사에서는 해마다 석가탄신일에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음악회를 열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가수 이은미와 하모니카 연주자 전재덕 등 여러 가수들이 참여한다는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음향을 조율하는 사람들이 분주해지자, 미리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이 플라스틱 의자에 하나 둘 앉기 시작했습니다.

쿠하는 다리가 아팠는지, 아니면 남들이 앉기 시작하니까 따라서 앉았는지 모르겠지만 꿈쩍도 안하고 버팁니다.

결국 보살님들이 직접 만들어 한 잔에 천원씩에 판매하는 식혜와 수정과로 유인합니다. 먹을 것 앞에서 쩔쩔 매는 '먹보' 쿠하의 석가탄신일 데이트는 식혜 한 컵으로 끝이 났습니다.

▲ 오색 연등 가득 하늘에 매달린 절집 마당이 음악회 준비로 분주합니다. ⓒ 정진영


길상사 경내에서 걸은 시간만 해도 2시간 30분이 넘자 슬슬 아이가 낮잠 포즈를 취합니다.
집이건 길에서건 일단 손이 엄마의 젖 근처로 다가오면 쿠하의 눈꺼풀은 거의 다 닫힌 상태가 됩니다. 얼른 흔들어 깨우며 먹을 것 사준다는 말로 잠을 깨웁니다. 어설프게 재웠다가는 밤새도록, 아무리 빨리 자도 최소한 새벽 3시까지는 놀아줘야 하기 때문에 더 걷게 해서 아예 깊히 곯아떨어지게 하는 작전을 폅니다. 온 가족이 똘똘 뭉쳐 '잠 없는 아이, 초저녁잠 재우기' 대성공입니다.

▲ 호기심 많은 쿠하는 길 밖으로 무슨 꽃이 피었나 유심히 관찰합니다. 자기가 모르는 꽃을 발견하자, 바로 엄마에게 질문이 들어옵니다. 물론 저도 모르는 난생 처음 보는 보라색 꽃이 거기 피어있었습니다. ⓒ 정진영


길상사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하나씩 눈도장 찍으며 산책하고, 이름을 알 만한 반가운 꽃들을 찾아다니느라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붓다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리고 전달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크면 붓다와 예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교단체에 의해 신처럼 되어버린 사내들에 대한 이야기, 돈과 절을 바치며 일신의 복을 구하는 이야기 말고, 혁신적인 생각과 실천으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다독인 부처님과 예수님에 대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딸로 크게 해 달라고 누군가 시주한 초록색 연등 밑에서 살짝 기도하고 일주문을 나섰습니다.

내려오는 길상사 봉고차량 안에서 힐끔 본 성북동 성당에서 내건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괜히 더 기분 좋게 만듭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현수막 하나로 배려와 존중을 배우고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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