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페스트균을!
[유럽기행 37]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와 그라벤(Graben) 거리
나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의 거리를 걷다가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라는 광장에 들어섰다. 새로운 시장이라는 뜻을 가진 이 광장은 과거에 밀가루 등 곡물을 사고팔던 시장이었고, 말 위에서 창으로 무예를 겨루는 마상 창시합이 벌어지던 곳이었다.
현재 이 광장은 시민들이 분수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조용한 광장이 되어 있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18세기 최고의 조각가 라파엘 도너(Georg Raphael Donner, 1693~1741년)가 만든 도너분수(Donnerbrunnen)는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차분한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도심에 자리 잡은 이 분수의 물소리는 마치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하다.
분수 중앙에는 아이들 4명의 조각상이 있고, 이 아이들이 안고 있는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물줄기가 분수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분수대 4면의 경계에는 분수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남자 2명, 여자 2명의 조각상이 분수를 장식하고 있다. 이 청동상들은 바로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다뉴브 강 주변의 오스트리아 속국을 상징하고 있다.
이곳은 케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의 활달함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겼다. 조금 흐리던 날씨는 가끔씩 따스한 햇볕을 내 얼굴에 쬐어주고 있었다.
나는 카페 의자에 앉아 도너분수에 자리 잡고 앉은 4명의 인물상에 대해 생각했다. 이 조각상들은 과거에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던 오스트리아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조각상들이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이 조각들을 보면서 과거의 그 광대했던 영토를 추억할 것이고, 여행자들도 오스트리아 영토를 상징하는 조각상들을 보면서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되돌아볼 것이다. 나는 분수대에 과거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담는 그들의 문화적 토양이 부러웠다.
털이 정갈하게 씻긴 폭스테리어 2마리가 눈앞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 거리에 참으로 어울리는 이 개들은 한 부부의 손에 이끌려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마치 강아지 인형 같이 생긴 이 개들이 너무 귀여워서 순식간에 카메라를 빼어들고 셔터를 눌렀다. 급하게 사진을 찍는 나를 본 폭스테리어의 주인 아저씨가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개의 걸음을 멈추고 개에게 앉는 자세를 취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사진을 차분하게 찍으라고 하였다. 웃으면서 호의를 베푸는 그가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나와 나의 가족은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정문 앞까지 다시 갔다가 왼쪽으로 약간 꺾인 거리로 들어섰다. 곧게 뻗은 이 길은 바로 그라벤(Graben) 거리였다. 한눈에 봐도 빈의 중심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리에는 많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케른트너 거리에 비해 조금은 더 화려하고 개성이 강한 가게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리의 폭이 30m가 넘는 그라벤 거리는 마치 광장 같은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로마제국이 빈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에 이곳은 참호였고, '그라벤'이라는 이름이 바로 참호를 뜻한다고 한다. 13세기 이후에 긴 참호를 매립하여 만든 길이기에 넓고 긴 광장같은 대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16~17세기에 바로크 문화를 꽃 피우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이 대로는 당당한 중심거리였다. 지금은 이 거리와 수직으로 이어지는 케른트너 거리의 다양함과 큰 규모에는 밀리지만 분위기 있는 가게들로 인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라벤 거리에는 멋진 레스토랑과 야외카페, 부티크, 브랜드숍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보행자 전용도로인 그라벤 거리의 바닥은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거리는 수백 년 거리이고 대로변의 건물들도 역사를 자랑하지만, 수리와 페인트칠을 계속 해온 탓에 깔끔하기 그지없다. 야외카페 좌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엔나커피를 즐기고 있지만, 돌로 깔린 거리 바닥은 마치 방금 청소를 마친 듯이 오물이 전혀 없었다. 거리 바닥의 이러한 청결함은 빈 시민들의 앞선 공중도덕 수준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가게의 간판들은 크기도 작고 촌스러운 붉은색이 보이지 않는다. 간판들이 옆 건물을 가릴 정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간판으로 가게를 찾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모든 간판들은 같은 모양이 전혀 없을 정도로 개성이 있고 색상도 달랐다. 건물들의 층수는 일정하지만 같은 모양의 건물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생김새들이 모두 달랐다.
그라벤 거리의 남쪽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레오폴트 1세(Leopold I) 분수이다.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던 합스부르크가의 황제(재위 1658~1705년)였던 그는 이곳 그라벤 거리를 포함한 빈을 예술·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킨 황제였다.
동상 아래 높은 좌대에 조각된 사자머리 청동상에서는 수도꼭지의 물처럼 물줄기가 분수대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보석으로 왕관 등을 장식했던 레오폴트 1세는 현재 이 거리에 청동상으로 남아 있었다. 실물로 본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가 황제의 왕관이 레오폴트 1세 머리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내가 이 거리에서 꼭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라벤 거리의 중앙에 자리한 페스트 기념주(Pestsäule)였다. 이 기념주는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가 지나간 후인 1679년에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트 1세가 페스트를 사라지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며 세운 탑이다. 그 당시에 빈에서만 무려 15만 명이나 페스트에 희생되었다고 하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신에게 감사드렸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기념주의 가장 아래 단은 인간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아래 단 3개의 면에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보헤미아, 헝가리의 문장이 황금으로 빛나고 있으니, 이는 거대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페스트 해방 기념주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부다페스트 등 제국의 곳곳에 남아 있다.
멀리서 본 기념주는 하나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이루고 있지만 이 기념주를 가까이에서 세밀하게 둘러본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래 단을 자세히 보면 십자가 아래의 날개 달린 어린 천사가 끔찍한 모습의 페스트균을 공격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페스트균이다.
이 페스트균의 다리와 팔뚝에 꿈틀거리는 근육은 전형적인 남자의 근육인데 묘하게도 가슴에는 여자의 유방이 돌출되어 있다. 가슴을 보면 분명히 여자인데 그 외의 신체 부분들은 남자인 것이다. 페스트균을 중성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런 조각을 남긴 것일까?
페스트균의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공포에 질린 표정은 기념주를 구경하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러나 당시 페스트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페스트균을 현미경으로 볼 수도 없었던 이들의 상상 속 세계에서는 페스트균이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조류 AI나 광우병이나 페스트균이나 인간을 괴롭히는 바이러스와 병균들의 혐오스러운 이미지는 당시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념주의 가운데 단은 오스트리아 황제를 나타내고 있다. 당시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가 왼쪽에 황금빛 칼을 차고 황금빛 왕관을 앞에 둔 채 그 윗 단의 신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다. 기념주의 배치를 보면 황제가 신과 인간 세상을 중개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기념주의 제일 윗 단은 신들과 천사의 영역이다. 윗 단의 가장 꼭대기에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상이 화려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기념주 전체가 회색의 석재이기에 신들이 사는 영역의 황금빛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아침 해가 비칠 때 이 황금은 특히 아름다울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이 기념주는 만들어진 형식이 참으로 기이한 조각이다. 정형화된 패턴을 따르는 조각품이 아니기에 마치 꿈 속 세상에서 본 듯한 몽환적인 세계를 보는 듯하다. 조각의 이미지가 페스트균을 담고 있기에 얼핏 보기에는 조금 징그럽기도 하지만, 창조적으로 만든 조각상 안에서 하나의 완성된 세계가 보였다. 볼록볼록 솟은 기념주의 몸통은 병균으로 부풀어 오른 환부같이도 보이지만, 그 형상이 천사들이 머무는 구름세계 같이도 보였다.
기념주를 같이 구경하던 아내와 딸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참 앞의 예쁜 옷가게의 쇼윈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이 페스트 박멸 기념주를 더 설명해줄 걸 그랬나 보다. 여행 가이드인 나의 유물에 대한 설명이 짧으니 이 두 여자는 눈에 화려하게 비치는 거리의 가게들에 현혹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이 도시의 특색 있는 가게 답사에 따라 나섰다.
▲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분수가 아름다운 한적한 광장이다. ⓒ 노시경
이곳은 케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의 활달함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겼다. 조금 흐리던 날씨는 가끔씩 따스한 햇볕을 내 얼굴에 쬐어주고 있었다.
나는 카페 의자에 앉아 도너분수에 자리 잡고 앉은 4명의 인물상에 대해 생각했다. 이 조각상들은 과거에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던 오스트리아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조각상들이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이 조각들을 보면서 과거의 그 광대했던 영토를 추억할 것이고, 여행자들도 오스트리아 영토를 상징하는 조각상들을 보면서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되돌아볼 것이다. 나는 분수대에 과거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담는 그들의 문화적 토양이 부러웠다.
▲ 빈의 폭스테리어.거리와 잘 어울리는 귀여운 녀석이다. ⓒ 노시경
나와 나의 가족은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정문 앞까지 다시 갔다가 왼쪽으로 약간 꺾인 거리로 들어섰다. 곧게 뻗은 이 길은 바로 그라벤(Graben) 거리였다. 한눈에 봐도 빈의 중심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리에는 많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케른트너 거리에 비해 조금은 더 화려하고 개성이 강한 가게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 그라벤 거리.빈의 역사적인 거리로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의 하나이다. ⓒ 노시경
16~17세기에 바로크 문화를 꽃 피우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이 대로는 당당한 중심거리였다. 지금은 이 거리와 수직으로 이어지는 케른트너 거리의 다양함과 큰 규모에는 밀리지만 분위기 있는 가게들로 인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라벤 거리에는 멋진 레스토랑과 야외카페, 부티크, 브랜드숍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보행자 전용도로인 그라벤 거리의 바닥은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거리는 수백 년 거리이고 대로변의 건물들도 역사를 자랑하지만, 수리와 페인트칠을 계속 해온 탓에 깔끔하기 그지없다. 야외카페 좌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엔나커피를 즐기고 있지만, 돌로 깔린 거리 바닥은 마치 방금 청소를 마친 듯이 오물이 전혀 없었다. 거리 바닥의 이러한 청결함은 빈 시민들의 앞선 공중도덕 수준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가게의 간판들은 크기도 작고 촌스러운 붉은색이 보이지 않는다. 간판들이 옆 건물을 가릴 정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간판으로 가게를 찾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모든 간판들은 같은 모양이 전혀 없을 정도로 개성이 있고 색상도 달랐다. 건물들의 층수는 일정하지만 같은 모양의 건물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생김새들이 모두 달랐다.
▲ 레오폴트 1세 분수.사자머리 청동상에서 물줄기가 분수 위로 떨어진다. ⓒ 노시경
동상 아래 높은 좌대에 조각된 사자머리 청동상에서는 수도꼭지의 물처럼 물줄기가 분수대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보석으로 왕관 등을 장식했던 레오폴트 1세는 현재 이 거리에 청동상으로 남아 있었다. 실물로 본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가 황제의 왕관이 레오폴트 1세 머리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내가 이 거리에서 꼭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라벤 거리의 중앙에 자리한 페스트 기념주(Pestsäule)였다. 이 기념주는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가 지나간 후인 1679년에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트 1세가 페스트를 사라지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며 세운 탑이다. 그 당시에 빈에서만 무려 15만 명이나 페스트에 희생되었다고 하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신에게 감사드렸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페스트 기념주.유럽에서 페스트균이 물러난 후 신에 감사하기 위해 세운 기념주이다. ⓒ 노시경
멀리서 본 기념주는 하나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이루고 있지만 이 기념주를 가까이에서 세밀하게 둘러본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래 단을 자세히 보면 십자가 아래의 날개 달린 어린 천사가 끔찍한 모습의 페스트균을 공격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페스트균이다.
이 페스트균의 다리와 팔뚝에 꿈틀거리는 근육은 전형적인 남자의 근육인데 묘하게도 가슴에는 여자의 유방이 돌출되어 있다. 가슴을 보면 분명히 여자인데 그 외의 신체 부분들은 남자인 것이다. 페스트균을 중성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런 조각을 남긴 것일까?
▲ 죽음을 당하는 페스트균.고통스러워하는 페스트균의 표정이 압권이다. ⓒ 노시경
기념주의 가운데 단은 오스트리아 황제를 나타내고 있다. 당시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가 왼쪽에 황금빛 칼을 차고 황금빛 왕관을 앞에 둔 채 그 윗 단의 신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다. 기념주의 배치를 보면 황제가 신과 인간 세상을 중개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기념주의 제일 윗 단은 신들과 천사의 영역이다. 윗 단의 가장 꼭대기에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상이 화려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기념주 전체가 회색의 석재이기에 신들이 사는 영역의 황금빛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아침 해가 비칠 때 이 황금은 특히 아름다울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이 기념주는 만들어진 형식이 참으로 기이한 조각이다. 정형화된 패턴을 따르는 조각품이 아니기에 마치 꿈 속 세상에서 본 듯한 몽환적인 세계를 보는 듯하다. 조각의 이미지가 페스트균을 담고 있기에 얼핏 보기에는 조금 징그럽기도 하지만, 창조적으로 만든 조각상 안에서 하나의 완성된 세계가 보였다. 볼록볼록 솟은 기념주의 몸통은 병균으로 부풀어 오른 환부같이도 보이지만, 그 형상이 천사들이 머무는 구름세계 같이도 보였다.
기념주를 같이 구경하던 아내와 딸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참 앞의 예쁜 옷가게의 쇼윈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이 페스트 박멸 기념주를 더 설명해줄 걸 그랬나 보다. 여행 가이드인 나의 유물에 대한 설명이 짧으니 이 두 여자는 눈에 화려하게 비치는 거리의 가게들에 현혹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이 도시의 특색 있는 가게 답사에 따라 나섰다.
덧붙이는 글
2007년 7월의 여행 기록입니다.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