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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위문단, '황군(皇軍) 만들기'에 몸바쳤네

발굴 영화 <병정님(兵隊さん)> 엿보기

등록|2008.05.14 13:41 수정|2008.05.14 17:07
상암동 새집으로 이사한 한국영상자료원이 집들이 행사로 준비한 개관영화제(5월 25일까지)가 한창 필름을 돌리고 있는 중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인 <청춘의 십자로>(1934)가 개막작으로 이미 상영됐고, 그밖에도 집들이 행사에 어울릴 만한 좋은 영화 여러 편이 필름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청춘의 십자로>만큼 화제를 모으지 못해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지난 5월 9일 개막일에 상영된 영화 가운데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있었다. 1944년에 개봉된 영화 <병정님(兵隊さん)>(방한준 감독).

일제 시대에 오늘날 국방홍보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조선군 보도부(報道部)가 제작한 영화다. 조선인이 감독을 맡고 조선인이 배우로 출연하기는 했지만 모든 대사가 일본어로 되어 있는 이 영화는, 사실 제목도 <병정님(兵隊さん)>이 아니라 <헤이타이상(兵隊さん)>이라 적는 것이 더 적절하지 싶다.

<병정님>이나 <신고합니다>나, 군대영화는 변함없네

▲ 영화 <병정님>의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기억도 가물거리는 <배달의 기수>나 입대한 인기 연예인들을 대거 동원해 그럭저럭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신고합니다>도 그러했지만, 군대에서 제작하거나 후원한 영화(또는 드라마)는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다 거기서 거기다.

'군대 와야 사람 된다' '피붙이 못지않은 뜨거운 전우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자' '군대, 생각보다 괜찮다' 같은 메시지는 <병정님>이나 <신고합니다>나 매한가지다. 전자가 대일본제국 황군(皇軍)을, 후자가 대한민국 국군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차이이지만.

논산훈련소 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장면들과 경이로운 '외탁의 힘'을 보여 주는 장면(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인 '눈물의 여왕' 전옥이 출연한다)이 흘러가는 가운데 훈련소 훈련도 막바지에 이르고, 드디어 '병정님'들이 그토록 고대했을 위문공연 장면이 등장한다. 위문공연이라 하면 단박에 <우정의 무대>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뜻밖에도 <병정님>에서 묘사된(물론 연출된 것이다) 위문공연은 상당히 '고상'하다.

<병정님>에 출연한 한·중·일 위문단

▲ 신문에 실린 영화 <병정님> 광고 ⓒ 이준희


처음 등장하는 여자 가수는 마금희. 도쿄(東京)음악학교를 졸업한 소프라노 마금희는 무대에 올라 당시 유행했던 이른바 '애국가요'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를 부른다. 그는 광복 이후인 1947년에 첫 국산음반을 발매한 고려레코드에서 '해방가요' <여명의 노래>를 녹음하기도 했다.

마금희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남자가수는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일본인으로 역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여 마금희의 선배가 되는 테너 히라마 분주는, 1941년에 조직된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당시 조선 서양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총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부른 노래 <この道>는 일본의 대표적인 가곡이다.

히라마 분주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바이올린 독주 연주자는 계정식. 일본 유학을 거쳐 독일 유학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히라마 분주가 이끈 조선음악협회에서 역시 이사를 맡았다. 연주한 곡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우정의 무대> 분위기는 물론 아니다.

계정식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남자 무용수는 조택원. 일제시대 여자 무용가로 최승희를 우선 꼽을 수 있다면, 남자 무용가로 그와 같은 위치에 있던 인물이 조택원이었다. <병정님>에서는 잠깐 등장해 단출하게 춤을 추었을 뿐이지만, 1941년에는 '내선일체'를 주제로 한 대규모 종합무용극 <부여회상곡>을 안무하기도 했다.

끝으로 조택원의 뒤를 이어 등장한 여자가수는 이향란(李香蘭). 일본인이었지만 중국식 예명을 사용한 덕에 당시에는 중국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리샹란으로, 일본에서는 리코란으로 불리면서 가수와 배우를 겸하며 동아시아 삼국을 넘나든(1945년 이후에는 홍콩과 미국에서 배우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말기 동양의 수퍼스타였다. 현실로 보자면 그가 조선의 일개 훈련소까지 와서 위문공연을 할 턱이 없었겠지만, 조선군 보도부에서 꽤나 신경 써서 만든 영화 <병정님>이었기에 이향란이 특별출연으로 노래까지 불렀던 것이다.

이 정도 면면이면 실로 상당한 거물들이 참여한 '다국적 위문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일본과는 또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 조선이었기에, 징병제를 보다 원활하게 실시하기 위해 조선군 보도부가 고심하며 애쓴 흔적이 보인다. 여하튼, 영화 줄거리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당대 유명 공연예술가들의 생생한 모습을 6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볼 수 있다는 것은, 제작자의 고심과 상관없이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장면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병정님> 광고에는 그밖에도 작곡가 이흥렬, 무용가 홍청자가 직접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출연은 하지 않았으나 <처녀총각> <홍도야 울지 마라> 같은 유명한 대중가요를 만든 작곡가 김준영 또한 주제가 <日本男兒> 등을 작곡해 <병정님>에 음악 담당으로 참여했다. 광고에 보이는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은 바로 김준영이 쓴 필명이다.

▲ 영화 <병정님> 주제가 <日本男兒> 음반 ⓒ 이준희


일전에 역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굴해 공개한 영화 <반도의 봄>(1941년 개봉)의 경우도 그러했듯, 일제시대 영화에는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의 시각으로 볼 때에도 대단히 흥미롭고 의미 있는 장면들이 꽤 있다. 황군 양성을 위한 복무가 누가 뭐래도 찜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것대로, 공연 장면의 자료적 가치는 또 그것대로 비판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병정님>은 오는 5월 18일 일요일 오후 2시 30분에 한 차례 더 상영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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