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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학교자율화정책' 입시지옥 무한경쟁 초래

"0교시 수업, 방과후 학교, 야간자율학습 문제많다" 전문가들 지적

등록|2008.05.14 19:06 수정|2008.05.15 08:14
서울에 사는 고교 2학년  김아무개양. 요즘 학교 가는 게 지옥가는 것처럼 싫다. 꼭두새벽에 알람이 터지도록 울어대도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왜 그럴까. 김 양의 하루를 따라가 본다.

모두 잠든 새벽 5시에 억지로 일어나 어머니가 챙겨준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한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학교로 옮겨 비몽사몽 0교시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업, 수업, 수업의 시간표대로 정규과목을 마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입시지옥 내몰리는 학생들"이명박 정부의 학교 자율화 정책으로 학생들이 입시지옥, 무한경쟁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과 도곡동 사이에 있는, 숙명여고 인근 횡단보도.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음.) ⓒ 신향식



슬슬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또 다른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 '선생님들'은 좀 특이하다. 학교 소속도 아니고 정식 교원 자격증도 없는데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니 말이다. 바로 학교 인근 사설학원의 강사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 새 정부가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학교자율화 조치 이후 사설학원 강사들이 방과후 교단을 점령하면서 새롭게 연출되는 풍속도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들 강사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교원의 자긍심 하나로 교단을 지켜왔건만, 이제는 정규수업이 끝나면 무장해제 당한 채 학생들을 교실까지 밀고 들어온 사설학원 강사들에게 내맡겨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방과후 학교'라는 사설학원 주도의 강제 보충수업을 들은 뒤 집에 가면 어느덧 자정이 가깝다. 식구들과 소소한 일상사에 대해 정겨운 대화를 나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공부방에 들어가면 책가방을 팽개치고 그냥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파묻는다.

하루 5시간 잠자기도 빠듯하다. 이러다 무슨 건강에 큰 이상이라도 생기는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날 때도 있다. 고교 진학에 앞서 치열한 입시 경쟁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각오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갈수록 별별 희안한 교육과 입시제도가 등장하며 목을 옭죄어 든다. 정규수업도 영어의 경우에는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교실을 달리해 가며 수준별 이동수업을 받는다. 더군다나 이런 수준별 이동학습을 다른 과목으로도 확대한다니 사실상 금지됐던 우열반이 되살아난 셈 아닌가.

"대치동 학원가"사설 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상가. 입주 업체의 상당수가 사설 학원이다.(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 신향식



급우들끼리도 실력에 따라 교실을 옮겨 수업을 받다보니 서먹서먹하고 예전 같은 동료의식은 느끼기 힘들다. 이제 고교 2학년인데 이 정도면 3학년에 진학하면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흔히 하는 말로 '지구를 떠나고 싶다'는 게 김양의 심정이다.

이상의 스토리는 실제로 우리 고교 교육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현실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학교는 말그대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입시 정글'로 변했다. 한때 금지됐던 0교시 수업은 각 학교마다 경쟁적으로 재개되고 있고, 사설학원 강사들이 교단에서 교사들의 가르침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

최근 경기도 김포의 한 고등학교는 방과후 학교 운영을 놓고 사설학원과 검은 뒷거래를 했다가 들통나 파문이 일기도 했다. 김포 경실련 등 6개 시민단체회원 500여 명은 최근 방과후 학교 비리 운영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학교  측이 사설학원에 방과후 교실 운영권을 넘겨주며 검은 돈을 챙겼다는 것이다.

김포 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통해 비리의혹을 방조한 학교 관리자와 학교운영회의 책임이 크다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했다.

이적 김포 경실련 공동대표는 "미래를 위한 교육은 투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깨끗해야 할 학교가 비리로 얼룩져서야 되겠냐"며 "가진 집 자녀와 없는 집 자녀를 구별하고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는 학교 자율화 정책은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뿐만이 아니다. 마산의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교육전문업체와 기부체납 형식의 계약을 통해 학교 안에 영어교실을 짓거나 지을 계획으로 알려져 '학교 내 학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설학원의 교실 점령과 입시지옥를 향한 무한경쟁에 대해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은 "아이들이 얼마나 더 비명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이런 밀어붙이기식 정책들이 수정될까 걱정이 앞선다"며 큰 우려를 나타냈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실제로 지난 4월 학교 자율화조치 실시 한 달 전부터 유명 사설학원 강사들을 한 달에 600만원씩 주고 교실에 불러다 방과후 수업을 한 학교도 있다. 실제로 이 사설 학원의 매출은 작년에 비해 약 60%가 증가했다고 한다. 학교 자율화 정책이 아니라 '학원 배불리기 정책'이란 설명이다.

학교는 학교대로 0교시 수업이니, 야간 자율학습이니 하는 명목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 일부 학생들을 밤 12시까지 학교에 붙잡아 놓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학생들은 최소한의 건강권마저도 무자비한 쥐어짜내기식 교육정책에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정 위원장은 이처럼 교실의 황폐화를 초래하는 살인적인 학교자율화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19일째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다 급기야 13일 오전 탈진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같은 날 전국이 동시에 같은 문제지의 시험을 치르는 일제고사도 난리다. 올해 3월부터 교육부가 전국 초중학교 일제고사 부활을 전격 결정하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역시나 사교육업체들과 학습지 시장만 신바람이 났다. 발빠르게 나선 한 사교육업체가 실시한 전국 학력평가 대비 모의고사에는 한 학생당 시험비용 2만원씩을 받는데도 무려 6천명이 응시했다.

한 유력 일간지도 사교육업체와 손잡고 모의고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역할을 해 언론 본연의 역할을 망각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울 시내 서점에서는 10여 개 학습지 업체가 내놓은 <중 1 진단평가 대비 문제집>이 8천원~1만원의 제법 비싼 가격에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 같은 공교육 포기와 입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정부 교육정책에 대해 전문가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김혜영 중앙대 교수(영어교육과)는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학교 자율화 정책 점검 간담회에서 "교육에 자본주의 경쟁논리나 상업화를 끌어들여서는 안 됨에도 4·15학교 자율화 계획은 이런 교육본질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다"며 "정책 집행의 순서가 잘못됐고, 속도와 일관성도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정부가 교육비를 줄이고 공교육이 사교육을 안고 가겠다며 결정한 방과후 자율화 정책이 오히려 도시와 농촌 간, 또는 계층 간 교육격차를 더욱 심화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곧, 학교에서 사교육을 진행하면 소위 잘 나가는 일류강사들이 수강료를 넉넉히 지급하지 못하고 근무여건도 열악한 농어촌 학교에서 강의할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도권의 학교들은 학원 강사가 진행하는 방과후 수업에 학생 1인당 50만원의 수강료를 걷어 주기도 한다. 따라서 유명 강사들은 서울 경기도 등 수도권으로 몰리고 나머지 강사들이 농어촌 학교로 가게 돼 소외지역 학생들은 수준 낮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교육현장의 붕괴에 대해 정부의 인식은 안이하기만 하다. 교육과학기술부 우형식 제1차관은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에 대해 "학교가 다양하고 질 높은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학교운영에 관한 권한을 학교장 등 학교 구성원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며 "교육 관련 규제를 철폐하여 교육의 자율과 자치에 밑바탕을 마련하고 학교 교육의 다양화를 유도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이 담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이나 그 밑에서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인사들이 실제 아비규환의 교육 현장을 목격하고 몸으로 겪어본다면 위의 속편한 얘기를 반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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