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슬픈 언니 이야기를 들어보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고 딸에게 쓰는 편지
예쁜 딸 서헌에게
서헌아! 엄마가 점심으로 '울면' 먹고, 빨래를 하다가 그만 양수가 터져 부리나케 병원에 달려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를 만난 지 십년이 되었다. 스무날을 먼저 태어나 성격이 급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를 보면 이런 태평스러운 아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빠름이 지배하는 시대에 느림으로 살아가는 것도 좋은 삶의 방식이다.
아빠는 너를 서헌이라는 이름보다는 '우리 예쁜 아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쁘다는 말은 그냥 얼굴이 예쁜 것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너 자체가 존귀하고 존엄하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난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란다.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존엄하다. 어떤 누구도 이 존귀함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제외시켜서도 안 되며, 제외되어도 안 된다. 이 존귀한 권리를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사람이 영원히 누려야 할 권리이며 진리다.
하지만 누리(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와 사람들이 존엄하고 예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태어난 환경과 문화에 따라 존엄보다는 오히려 천하고, 비천한 자로 대접을 받는 이들이 아직도 누리에 있었다. 이 존엄한 가치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 내내 가슴이 아팠다
서헌아. 지난 해 여름, 아빠가 뙤약볕에서 남강 둔치와 어린이 공원에서 일할 때에 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나라 이름이 기억나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두 사람이 죽었던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던 나라 말이다. 아프… 그래 '아프가니스탄!'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했지만 두 분이 생명을 잃었다. 우리 모두가 슬펐고, 마음이 아팠다. 첫 만남은 좋아야 되는데 슬픔과 고통으로 만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네 마음이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면 안 되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아빠는 얼마 전 우리가 경험한 일보다 더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만남을 또 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17세기 아프가니스탄에 살았던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분은 카불(아프가니스탄 수도)을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라고 읊었다. 책 제목을 여기에서 지었다. 1959년부터 2003년까지 마리암이라 이름 지어진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일까? 뜨거워 사람이 살지 못하는 나라일까? 아프가니스탄은 배움이 없는 사람도 시를 외우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배움이 없는 마리암조차 시를 읊는 나라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알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시를 읊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가 마리암을 통해서 아빠에게 다가올 때는 슬픔, 아픔, 고통, 시리도록 추운 고통스러운 나라였다.
아빠와 딸이라면 만날 함께 밥 먹고, 놀고, 잠자고, 여행도 가잖아. 아빠와 서헌이처럼. 하지만 마리암과 아빠 잘릴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집에 살지 않았다. 한 번씩 찾아와서 선물을 줄 뿐이었다. 마리암은 그런 아빠가 좋았다. 그런데 잘릴은 마리암이 아빠라 부를 수 없는 아빠였다. '하라미'였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사생아'라는 뜻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운 뜻이라 나중에 커서 네 스스로 알아보기를 원한다.
'하라미' 마리암, 그녀의 삶은 암흑이었다
마리암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결코 침해받을 수 없는 존귀함을 침해받는 끔찍하고 안타까운 삶을 시리도록 아픈 삶을 살았다. 해님이 천 개라면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마리암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 사랑이 아니라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고, 폭력과 고통만이 마리암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죽임과 살육, 증오가 흘러 넘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나라였기에 뜨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싹하고 추웠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이 아프고 시린 여성의 삶을 말과 단어로 표현하면서 낱말 하나 하나를 아름다움으로 채웠다.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끔찍함을 담아낼 수 있을까? 아빠는 낱말 하나, 한 구절, 한 장씩을 읽어가면서 너와 같은 딸이자, 여성이 천한 존재로 비천한 자로 취급받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고, 어떤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 날 마리암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빠를 찾아 나선다. 아빠는 만나주지 않았다. 아빠 없는 누리가 된 것이다. 마리암이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아빠 잘릴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나이가 서른 살이나 많은 남자와 마리암을 결혼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딸을 정말 사랑한다면 마리암 엄마와 마리암이 걸어왔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게 해야지만 잘릴은 아직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구조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마음 한 자리에는 자리 잡고 있었지만.
사랑 없이 태어났던 마리암처럼 또 다른 마리암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비극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비극은 또 다시 잉태하게 되어 있다. 마리암과 결혼할 남자는 라시드였는데 라시드는 "내 고향에서는 눈길 한 번 잘못 던져도,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칼부림이 나.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여자의 얼굴을 남편만 볼 수 있어"라고 할 만큼 여성을, 곧 마리암을 사람,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 짐승, 물건으로 생각했다.
엄마 나나가 생전에 말했지. "단 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 것)이다"고. 마리암은 물었다.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 그 때 엄마는 말했다. 참을 일은 많고도 많다고.
탈레반은 여성에게 화장품과 장신구를 금하며, 공공장소에서는 웃어서는 안 되고, 학교에 다닐 수 없으며, 간통을 하면 돌로 쳐죽인다는 사실을 통해 마리암은 엄마가 말한 '참을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마리암에게 참음은 고상한 인격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치욕과 모욕을 견디는 참음이었다. 이는 참음이 아니요, 강요이며 모욕이다. 이런 참음은 곧 죽음이다.
마리암, 억압의 세상에 저항하다
죽음을 강요하는 세상과 문화에 너는 모욕으로 살아가지 말고, 참지 말고 거부하면서 당당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라. 마리암에 강요된 참음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거부해야 할 억압이다. 이 비극, 억압을 마리암 스스로 거부하고 끊기에는 사회와 구조가 견고했고, 마리암은 아직 무력했다.
하지만 비극은 한 여성을 만나면서 굴레를 조금씩 벗기 시작한다. 바로 라일라다. 라일라는 배움이 있는 여성으로 존중받았고 가족이 폭격 때문에 죽자 마리암 남편 라시드에 의해 구출 받았다. 마리암은 처음에는 자기보다 예쁘고, 잘난 라일라가 싫었다. 어쩌면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로 살아가는 자신과 여성이면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라일라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을 거다.
여성이자 사람으로 살아왔던 라일라도 라시드를 만남으로써 비극으로 바뀐다. 라시드는 마리암과 라일라에게 사랑을 통하여 맺어진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독재자였으며, 자신들을 물건으로 취급한 자였다. 독재자란 오로지 자기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밑에 있는 자들을 억압하고, 권리를 빼앗는 자다. 그런 의미에서 라시드는 독재자였다. 라시드는 자신만 인간이었을 뿐 마리암과 라일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자가 통치하는 시대는 비극을 만들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육신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인격과 사상, 이념에는 자유가 없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육신은 인간이자 여성이었지만 그들은 참아야 하며, 무참히 짓밟히는 존재였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통탄스러운 비극이다.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면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짓눌려 살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자기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그 독재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스스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독재에 항거하게 된다. 마리암과 라일라도 자신들에게 압제했던 독재자, 곧 라시드에게 저항한다. 둘은 같은 폭압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공동운명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다 붙잡혀 온 라일라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던 라시드를 마리암이 삽으로 쳐 죽이는 모습은 잔혹한, 끔찍한 살해이지만 한 여성이 새롭게 거듭나는 순간이다.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고, 라일라만은 잃을 수 없음을 깨달은 마리암의 항거였다. 폭력과 비열함,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살게 했던 라시드를 향한 아니,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모든 문화와 정치, 사상과 이념을 향한 일격이었다.
라시드와 여성을 짓밟는 문명과 문화, 사상을 향한 일격으로 모든 것이 끝났지 않았다.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거짓된 문명을 향한 일격은 한 순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인간을 거스르는 자를 향한 일격이 오히려 죄가 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마리암은 "내 딸아. 이제 이걸 알아라. 잘 기억해둬라.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행해 손가락질을 한단다. 언제나 말이다. 그것을 명심해라"라는 죽은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라시드가 죽었지만 아직도 마리암은 '하라미'의 굴레, '여성'이라는 굴레와 억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마리암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총구가 그를 향해 달려올 때 하라미로 태어났던 마리암, 쓸모없는 존재였던 그를 돌아본다. 잡초였던 그를 반추한다. 육신 장막이 마지막 땅을 떠나는 순간 마리암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고 했다.
딸아, 너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다
자신을 대신하여, 여성을 짐승으로 대하는 문명에 대항한 마리암을 기리면서 라일라는 태어난 생명에게 마리암이라는 이름을 새겨준다. 라일라도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라시드와 탈레반이 제거되어 여성에게 해방아 찾아온 것 같지만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은 전쟁과 테러와 증오가 난무한 곳이다. 다시 새겨보면 여성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일은 라시드, 탈레반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회복시켜 준다고 했지만 아직 아프가니스탄은 죽임이 자리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있다.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아버지가 아니었던 잘릴은 죽음을 앞에 두고 마리암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헤라트에 왔던 날, 만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 너를 내 딸로 삼지 않고, 그곳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게 했던 걸 후회한다.… 사랑하는 마리암. 나를 용서해다오. 나를 용서해다오. … 내가 전에는 그러하지 못했지만, 네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고 너를 맞아들이고 너를 가슴에 안을 기회를 주면 좋겠다."
마리암은 이 편지를 읽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후회와 회한을 담은 잘릴의 편지가 마리암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편지 한 번으로 억압받았던 마리암, 폭력에 짓밟힌 영혼에 용서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압제, 억압한 자들은 너무 쉽게 용서를 구한다. 말 한마디로 모든 잘못을 덮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일에 저항해야 한다.
서헌아.
아빠가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만큼 귀하고 고귀한 것은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일만큼 귀한 것은 없다. 누리에는 탈레반뿐만 아니라 정치철학과 사상, 이념, 종교라는 이름으로 남성, 여성, 어린이, 어르신뿐만 아니라 자기와 다른 사상과 철학을 가진 자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너무도 많다. 어떤 것도 '인간' 그 자체를 억압할 수 없다. 억압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마리암과 라일라라는 두 여성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 존엄성을 해하고, 훼손당하는지를 보여주지만 우리 모두가 이 참혹한 인간성 말살을 범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와 문명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너 자신을 발견하면서 너 자신을 존중하면서, 다른 이도 너와 똑같은 존귀한 자임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한다. 네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너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별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천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네가 존귀한 것만큼 모든 사람도 똑 같이 존귀함을 잊지 말아라.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서헌아! 엄마가 점심으로 '울면' 먹고, 빨래를 하다가 그만 양수가 터져 부리나케 병원에 달려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를 만난 지 십년이 되었다. 스무날을 먼저 태어나 성격이 급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를 보면 이런 태평스러운 아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빠름이 지배하는 시대에 느림으로 살아가는 것도 좋은 삶의 방식이다.
아빠는 너를 서헌이라는 이름보다는 '우리 예쁜 아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쁘다는 말은 그냥 얼굴이 예쁜 것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너 자체가 존귀하고 존엄하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난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란다.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존엄하다. 어떤 누구도 이 존귀함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제외시켜서도 안 되며, 제외되어도 안 된다. 이 존귀한 권리를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사람이 영원히 누려야 할 권리이며 진리다.
하지만 누리(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와 사람들이 존엄하고 예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태어난 환경과 문화에 따라 존엄보다는 오히려 천하고, 비천한 자로 대접을 받는 이들이 아직도 누리에 있었다. 이 존엄한 가치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 내내 가슴이 아팠다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현대문학
서헌아. 지난 해 여름, 아빠가 뙤약볕에서 남강 둔치와 어린이 공원에서 일할 때에 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나라 이름이 기억나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두 사람이 죽었던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던 나라 말이다. 아프… 그래 '아프가니스탄!'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했지만 두 분이 생명을 잃었다. 우리 모두가 슬펐고, 마음이 아팠다. 첫 만남은 좋아야 되는데 슬픔과 고통으로 만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네 마음이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면 안 되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아빠는 얼마 전 우리가 경험한 일보다 더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만남을 또 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17세기 아프가니스탄에 살았던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분은 카불(아프가니스탄 수도)을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라고 읊었다. 책 제목을 여기에서 지었다. 1959년부터 2003년까지 마리암이라 이름 지어진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일까? 뜨거워 사람이 살지 못하는 나라일까? 아프가니스탄은 배움이 없는 사람도 시를 외우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배움이 없는 마리암조차 시를 읊는 나라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알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시를 읊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가 마리암을 통해서 아빠에게 다가올 때는 슬픔, 아픔, 고통, 시리도록 추운 고통스러운 나라였다.
아빠와 딸이라면 만날 함께 밥 먹고, 놀고, 잠자고, 여행도 가잖아. 아빠와 서헌이처럼. 하지만 마리암과 아빠 잘릴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집에 살지 않았다. 한 번씩 찾아와서 선물을 줄 뿐이었다. 마리암은 그런 아빠가 좋았다. 그런데 잘릴은 마리암이 아빠라 부를 수 없는 아빠였다. '하라미'였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사생아'라는 뜻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운 뜻이라 나중에 커서 네 스스로 알아보기를 원한다.
'하라미' 마리암, 그녀의 삶은 암흑이었다
마리암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결코 침해받을 수 없는 존귀함을 침해받는 끔찍하고 안타까운 삶을 시리도록 아픈 삶을 살았다. 해님이 천 개라면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마리암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 사랑이 아니라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고, 폭력과 고통만이 마리암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죽임과 살육, 증오가 흘러 넘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나라였기에 뜨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싹하고 추웠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이 아프고 시린 여성의 삶을 말과 단어로 표현하면서 낱말 하나 하나를 아름다움으로 채웠다.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끔찍함을 담아낼 수 있을까? 아빠는 낱말 하나, 한 구절, 한 장씩을 읽어가면서 너와 같은 딸이자, 여성이 천한 존재로 비천한 자로 취급받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고, 어떤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 날 마리암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빠를 찾아 나선다. 아빠는 만나주지 않았다. 아빠 없는 누리가 된 것이다. 마리암이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아빠 잘릴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나이가 서른 살이나 많은 남자와 마리암을 결혼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딸을 정말 사랑한다면 마리암 엄마와 마리암이 걸어왔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게 해야지만 잘릴은 아직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구조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마음 한 자리에는 자리 잡고 있었지만.
사랑 없이 태어났던 마리암처럼 또 다른 마리암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비극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비극은 또 다시 잉태하게 되어 있다. 마리암과 결혼할 남자는 라시드였는데 라시드는 "내 고향에서는 눈길 한 번 잘못 던져도,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칼부림이 나.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여자의 얼굴을 남편만 볼 수 있어"라고 할 만큼 여성을, 곧 마리암을 사람,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 짐승, 물건으로 생각했다.
엄마 나나가 생전에 말했지. "단 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 것)이다"고. 마리암은 물었다.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 그 때 엄마는 말했다. 참을 일은 많고도 많다고.
탈레반은 여성에게 화장품과 장신구를 금하며, 공공장소에서는 웃어서는 안 되고, 학교에 다닐 수 없으며, 간통을 하면 돌로 쳐죽인다는 사실을 통해 마리암은 엄마가 말한 '참을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마리암에게 참음은 고상한 인격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치욕과 모욕을 견디는 참음이었다. 이는 참음이 아니요, 강요이며 모욕이다. 이런 참음은 곧 죽음이다.
마리암, 억압의 세상에 저항하다
죽음을 강요하는 세상과 문화에 너는 모욕으로 살아가지 말고, 참지 말고 거부하면서 당당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라. 마리암에 강요된 참음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거부해야 할 억압이다. 이 비극, 억압을 마리암 스스로 거부하고 끊기에는 사회와 구조가 견고했고, 마리암은 아직 무력했다.
하지만 비극은 한 여성을 만나면서 굴레를 조금씩 벗기 시작한다. 바로 라일라다. 라일라는 배움이 있는 여성으로 존중받았고 가족이 폭격 때문에 죽자 마리암 남편 라시드에 의해 구출 받았다. 마리암은 처음에는 자기보다 예쁘고, 잘난 라일라가 싫었다. 어쩌면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로 살아가는 자신과 여성이면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라일라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을 거다.
여성이자 사람으로 살아왔던 라일라도 라시드를 만남으로써 비극으로 바뀐다. 라시드는 마리암과 라일라에게 사랑을 통하여 맺어진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독재자였으며, 자신들을 물건으로 취급한 자였다. 독재자란 오로지 자기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밑에 있는 자들을 억압하고, 권리를 빼앗는 자다. 그런 의미에서 라시드는 독재자였다. 라시드는 자신만 인간이었을 뿐 마리암과 라일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자가 통치하는 시대는 비극을 만들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육신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인격과 사상, 이념에는 자유가 없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육신은 인간이자 여성이었지만 그들은 참아야 하며, 무참히 짓밟히는 존재였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통탄스러운 비극이다.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면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짓눌려 살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자기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그 독재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스스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독재에 항거하게 된다. 마리암과 라일라도 자신들에게 압제했던 독재자, 곧 라시드에게 저항한다. 둘은 같은 폭압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공동운명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다 붙잡혀 온 라일라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던 라시드를 마리암이 삽으로 쳐 죽이는 모습은 잔혹한, 끔찍한 살해이지만 한 여성이 새롭게 거듭나는 순간이다.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고, 라일라만은 잃을 수 없음을 깨달은 마리암의 항거였다. 폭력과 비열함,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살게 했던 라시드를 향한 아니,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모든 문화와 정치, 사상과 이념을 향한 일격이었다.
라시드와 여성을 짓밟는 문명과 문화, 사상을 향한 일격으로 모든 것이 끝났지 않았다.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거짓된 문명을 향한 일격은 한 순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인간을 거스르는 자를 향한 일격이 오히려 죄가 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마리암은 "내 딸아. 이제 이걸 알아라. 잘 기억해둬라.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행해 손가락질을 한단다. 언제나 말이다. 그것을 명심해라"라는 죽은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라시드가 죽었지만 아직도 마리암은 '하라미'의 굴레, '여성'이라는 굴레와 억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마리암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총구가 그를 향해 달려올 때 하라미로 태어났던 마리암, 쓸모없는 존재였던 그를 돌아본다. 잡초였던 그를 반추한다. 육신 장막이 마지막 땅을 떠나는 순간 마리암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고 했다.
딸아, 너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다
자신을 대신하여, 여성을 짐승으로 대하는 문명에 대항한 마리암을 기리면서 라일라는 태어난 생명에게 마리암이라는 이름을 새겨준다. 라일라도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라시드와 탈레반이 제거되어 여성에게 해방아 찾아온 것 같지만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은 전쟁과 테러와 증오가 난무한 곳이다. 다시 새겨보면 여성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일은 라시드, 탈레반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회복시켜 준다고 했지만 아직 아프가니스탄은 죽임이 자리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있다.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아버지가 아니었던 잘릴은 죽음을 앞에 두고 마리암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헤라트에 왔던 날, 만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 너를 내 딸로 삼지 않고, 그곳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게 했던 걸 후회한다.… 사랑하는 마리암. 나를 용서해다오. 나를 용서해다오. … 내가 전에는 그러하지 못했지만, 네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고 너를 맞아들이고 너를 가슴에 안을 기회를 주면 좋겠다."
마리암은 이 편지를 읽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후회와 회한을 담은 잘릴의 편지가 마리암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편지 한 번으로 억압받았던 마리암, 폭력에 짓밟힌 영혼에 용서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압제, 억압한 자들은 너무 쉽게 용서를 구한다. 말 한마디로 모든 잘못을 덮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일에 저항해야 한다.
서헌아.
아빠가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만큼 귀하고 고귀한 것은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일만큼 귀한 것은 없다. 누리에는 탈레반뿐만 아니라 정치철학과 사상, 이념, 종교라는 이름으로 남성, 여성, 어린이, 어르신뿐만 아니라 자기와 다른 사상과 철학을 가진 자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너무도 많다. 어떤 것도 '인간' 그 자체를 억압할 수 없다. 억압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마리암과 라일라라는 두 여성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 존엄성을 해하고, 훼손당하는지를 보여주지만 우리 모두가 이 참혹한 인간성 말살을 범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와 문명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너 자신을 발견하면서 너 자신을 존중하면서, 다른 이도 너와 똑같은 존귀한 자임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한다. 네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너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별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천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네가 존귀한 것만큼 모든 사람도 똑 같이 존귀함을 잊지 말아라.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덧붙이는 글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ㅣ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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