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꿈꾸며 날아간 엄지손가락
관훈미술관 김성응 개인전 <안과 밖의 공간>(5월 20일까지)
서울 인사동 거리는 붐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남녀노소, 낮밤 없이 이 거리를 누빈다. 그런데 이 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군중 속의 고독'이다. 그 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외로움, 소외, 불통, 불화, 단절 따위를 느낀다.
관훈미술관을 들렀다. 조각전이다. 몇 발자국 들어서 입구에 진열된 작품을 보는데 궁금증이 들었다. 발포석고야? 차돌은 아니겠지... 그러나 벽에 걸린 작품과 바닥에 놓인 작품을 둘러보면서 놀라움이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 미쳤군! 아니 거대한 돌맹이를 두부 자르듯 잘라놓은 건 그럴 수 있다지만 창호지 문구멍 내듯 바위를 관통해서 뚫어 놓은 것은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어이구,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게다가 송아지만한 바위를 골다공증 환자의 뼈처럼 구멍을 뚫어 놓고 '안과 밖의 공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장에 작가가 있다면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다행이 수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부인도 곁에 있었다. 팸플릿을 펼쳐보니 연륜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강열한 생명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그의 작업은 소통을 위한 절규로 들렸다. 차돌멩이, 마천석과 자연석에 무수한 구멍을 뚫어 안과 밖으로 공간을 만드는 작업. 일면 단순한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재료와 작업과정을 상상하면 예사롭지 않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상상해보라. 이 단단한 차돌을 뚫어내기 위한 소리를. 무수히 빗겨나기도, 팅겨나기도 할 거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은 어느 정도될까. 돌가루 먼지는 어쩌고.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미친짓이다! 누구에게 시킬 일도 못된다. 너무 힘들어 시켜볼 생각도 했지만 하청업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못한다 했다. 돈으로 우격다짐으로 몰아부친다면 못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한들 어떤 의미가 있을건가. 결국 작가가 직접 할 밖에 없다.
작년 겨울은 유난이 추웠다. 12월 어느날 사단이 일어났다. 바위에 구멍 뚫는 작업을 하다 엄지 손가락 뿌리 부분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 통증과 출혈과 불안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오금이 저려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끔직한 그때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다행이 엄지는 다시 제 자리에 봉합 되었지만 감각이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몇 차례 수술을 더 받아야 한다는데 부디 정상으로 회복되길 바란다.
조각가에게 손가락 부상은 치명적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 뚫는다. 밖에서 안으로. 사방에서 뚫다 보면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뚫는 수만큼 커진다. 그리고 맥을 형성한다. 마치 나뭇잎처럼, 실핏줄처럼, 세포처럼, 생명체처럼….
정교하고 강력하게 뚫린 길을 따라 교차하며 공간이 생성된다. 그 공간은 육중하고 꽉막힌 돌멩이를 가볍고 부드럽고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전이한다. 석고처럼 처음부터 부드러운 재료라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떠올리면 처절하다. 또한 음양이 교접하고 불꽃 튀는 융합을 거쳐 세포 분열하는 구멍들은 소통과 사랑을 꿈꾸는 듯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듯 무모할 정도로 집요한 신념도 느껴진다. 공간의 창출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바위는 어떤 이유에서 굳어 단단하게 뭉쳐버린 대화와 소통의 단절로 인한 외로움, 고독, 소외로 다가온다. 자본과 물신화된 현대사회와 인간을 일컫는지도 모른다.
소통은 뚫음이다. 뚫음과 소통을 통해 공간에 생명감을 불어 넣고 있다. 소통과 생명을 위해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며 작업하다 떨어져 나간 분신을 접합한 다음에도 하던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안과 밖을 내는 뚫음을 소통으로, 소통으로 생성되는 공간은 생명으로 인식한 탓이다.
생명은 사랑과 고통을 동반하고 그것은 집념 없이 넘어설 수 없다. 문제의 그 작품도 전시장 벽에 걸려 전시되고 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그가 손으로 가리켰다. 이미 돌맹이 조각이 아니라 세포가 숨쉬고 꿈틀거리는 생명체고 사랑 덩어리다.
관훈미술관을 들렀다. 조각전이다. 몇 발자국 들어서 입구에 진열된 작품을 보는데 궁금증이 들었다. 발포석고야? 차돌은 아니겠지... 그러나 벽에 걸린 작품과 바닥에 놓인 작품을 둘러보면서 놀라움이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 미쳤군! 아니 거대한 돌맹이를 두부 자르듯 잘라놓은 건 그럴 수 있다지만 창호지 문구멍 내듯 바위를 관통해서 뚫어 놓은 것은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어이구,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 안과 밖의 공간김성응 개인전 ⓒ 박건
게다가 송아지만한 바위를 골다공증 환자의 뼈처럼 구멍을 뚫어 놓고 '안과 밖의 공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장에 작가가 있다면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다행이 수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부인도 곁에 있었다. 팸플릿을 펼쳐보니 연륜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강열한 생명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그의 작업은 소통을 위한 절규로 들렸다. 차돌멩이, 마천석과 자연석에 무수한 구멍을 뚫어 안과 밖으로 공간을 만드는 작업. 일면 단순한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재료와 작업과정을 상상하면 예사롭지 않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 안과 밖의 공간김성응 개인전 ⓒ 박건
그래서 미친짓이다! 누구에게 시킬 일도 못된다. 너무 힘들어 시켜볼 생각도 했지만 하청업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못한다 했다. 돈으로 우격다짐으로 몰아부친다면 못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한들 어떤 의미가 있을건가. 결국 작가가 직접 할 밖에 없다.
작년 겨울은 유난이 추웠다. 12월 어느날 사단이 일어났다. 바위에 구멍 뚫는 작업을 하다 엄지 손가락 뿌리 부분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 통증과 출혈과 불안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오금이 저려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끔직한 그때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다행이 엄지는 다시 제 자리에 봉합 되었지만 감각이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몇 차례 수술을 더 받아야 한다는데 부디 정상으로 회복되길 바란다.
조각가에게 손가락 부상은 치명적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 뚫는다. 밖에서 안으로. 사방에서 뚫다 보면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뚫는 수만큼 커진다. 그리고 맥을 형성한다. 마치 나뭇잎처럼, 실핏줄처럼, 세포처럼, 생명체처럼….
정교하고 강력하게 뚫린 길을 따라 교차하며 공간이 생성된다. 그 공간은 육중하고 꽉막힌 돌멩이를 가볍고 부드럽고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전이한다. 석고처럼 처음부터 부드러운 재료라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떠올리면 처절하다. 또한 음양이 교접하고 불꽃 튀는 융합을 거쳐 세포 분열하는 구멍들은 소통과 사랑을 꿈꾸는 듯하다.
▲ 안과 밖의 공간김성응 개인전 ⓒ 박건
▲ 김성응 개인전김성응 작가 손 ⓒ 박건
소통은 뚫음이다. 뚫음과 소통을 통해 공간에 생명감을 불어 넣고 있다. 소통과 생명을 위해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며 작업하다 떨어져 나간 분신을 접합한 다음에도 하던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안과 밖을 내는 뚫음을 소통으로, 소통으로 생성되는 공간은 생명으로 인식한 탓이다.
생명은 사랑과 고통을 동반하고 그것은 집념 없이 넘어설 수 없다. 문제의 그 작품도 전시장 벽에 걸려 전시되고 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그가 손으로 가리켰다. 이미 돌맹이 조각이 아니라 세포가 숨쉬고 꿈틀거리는 생명체고 사랑 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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